들어가는 말
주임신부: 김 지완(아우구스티노)신부님 사진: 최 베르나르도 |
십 주년 기념 책자의 발간이 지니는 궁극적 의미는 단순히 공동체의 역사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 성원들의 올바른 역사 이해와 평가를 거쳐, 이를 보다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디딤돌로 삼는데 있다 하겠습니다. 지난 세월 우리 공동체는 온갖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가운데, 전 신자가 마음을 모아 열과 성을 다해 지금의 성전을 마련 하였습니다. 실로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점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은총의 10년” 이라는 우리 십 주년 행사 주제어는, 이렇듯 지난 10년을 가장 잘 아우르며 특징 짓는 동시에,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임을 고백하며 감사하는 우리의 마음을 잘 드러내 주는 듯 합니다.
우리 공동체에 베푸신 하느님의 은총이 헛되지 않도록 이제 우리는 앞으로의 새로운 십 년, 그리고 그 너머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기반을 더욱 튼튼히 다져나가야 하겠습니다. 그 과정의 시작으로써 저는 이 글을 통해 지금껏 우리가 힘들여 마련한 이 성전의 본래적 의미를 여러분과 함께 되새겨 보고 싶습니다. 우리에게는 성전 장식, 교리실 추가, 더 넓은 주차 공간 확보, 편의 시설 보수 및 확충 등의 과제가 여전히 산재해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따른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서도, 이보다 더 중요한 내적 과제, 즉,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보다 더 건강하고 행복 하게 만드는 일에 집중하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성당의 물리적이고 외면적인 기본 틀을 마련하는 데 분주 했다면, 이제는 성당을 참으로 성당답게 만드는 일, 즉, 보다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때입니다.
모든 건축에 있어서 설계도가 필요하듯이, 교회 공동체의 내실을 기하는 데 있어서도 성원 모두가 이해 할 수 있는 청사진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내적이고 영적인 청사진은 일반 건축과는 달리, 우리 고유의 창의성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 본래의 모습을 재조명해 보면서, 우리 나름대로 이해하고 어느 정도 실현 할 수 있는 정도의 그림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저는 그런 청사진을 지금 여러분과 함께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난해한 교의 신학적 내용 보다는, 주로 우리 귀에 익은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성전의 내면적 모습, 하느님 백성의 참 모습을 그려 볼까 합니다.
교회 공동체라면 반드시 이러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식의 어떤 당위성을 말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품을 수 있는 우리의 꿈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으며, 그 꿈을 향해 여러분과 함께 걷고자 하는 저의 소망을 여기에 담고자 합니다.
만남의 장소
성전은 하느님을 뵙는 장소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곳이며, 공동체가 하느님을 영접 하는 곳입니다. 또한 우리의 전 인격이 성체 성사를 통해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때문에 이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성전이 여타의 장소와 구별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성전 안에만 계시지는 않습니다. 그 옛날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하느님께 봉헌 하며 바쳤던 기도 속에서도 이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의 눈을 뜨시고 밤낮으로 이 집을, 곧 당신께서 ‘내 이름이 여기에 머무를 것이다.’ 하고 말씀 하신 이곳을 살피시어, 당신 종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열왕기 상권8,27-30) 그렇게 하늘 위의 하늘 마저도 거처로 합당치 않을 그분은 실상은 도무지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신 무소부재의 하느님이시지만, 우리 역시 성전을 마련하고 이 곳에서 미사와 기도를 드릴 때에는 솔로몬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주 저의 하느님, 당신 종의 기도와 간청을 돌아보시어, 오늘 당신 종이 당신 앞에서 드리는 이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열왕기 상 8, 29)
하느님께서 머무시면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곳이 성전이지만, 하느님과의 만남이 언제나 일방적으로 우리 편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하시고 우리에게 소명을 내려 주시는 곳이 또한 성전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곳, 그 곳은 결코 평범한 장소 일 수 없습니다. 평범한 목자로 돌아가 양 떼를 치고 있던 모세를 불러 내어 그에게 특별한 사명을 내리 실 때, 불에 타는 데도 없어지지 않는 떨기 한가운데서, 하느님께서는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발을 벗어라.”(탈출기 3, 5)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모세가 서 있던 곳이 거룩한 이유는 기이한 떨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자신 때문입니다. 그 소명이 특별한 이유는 그 소명을 내리시는 분께서 하느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거룩한 곳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하느님 때문입니다. 일상에서의 신발을 벗고 오직 하느님께만 몰입하는 곳이 성전이며 교회 입니다.
구원의 장소
성전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라고 한다면, 이는 또한 성전이 곧 구원의 장소임을 의미합니다. 참된 구원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 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구원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대목을 잠깐 살펴 봅시다(마르코 5, 21-32 참조).야이로 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다 죽어가는 자신의 딸을 살려 달라고 간곡히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듣고 그와 함께 나서십니다. 그 때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르며 밀쳐 댔는데, 열 두 해 동안이나 하혈 하던 여인도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댑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라는 믿음이 결국은 이 여인의 병을 낫게 했습니다. “딸아,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코 5, 34) 라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말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소식을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코 5, 36) 라고 말씀하시고서는, 아이가 있는 회당장의 집으로 가셔서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타 쿰,”(마르코 5, 41) 곧, 소녀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아이는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나이는 열 두 살 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여인도 열 두 해 동안이나 하혈로 고통 받았습니다. 여기서 열 둘이라는 숫자가 서로 일치 하고는 있지만 그다지 큰 의미는 없어 보입니다.반면에 두 기적 이야기 내면을 관통하고 있는 일치점은 결코 간과 할 수 없는 데, 이는 다름 아닌 믿음 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다.”(마르코 5,24)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코 5,37)
예수님께서는 소녀를 살리기 위해 야이로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순간에 절박한 심정으로 하혈하는 여인은 예수님에게로 향해 갔습니다. 밀쳐대는 군중을 헤쳐 가며, 간신히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뻗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만 해도 구원 받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여인의 손은 다름 아닌 믿음의 손이었습니다. 감추고 속이고 욕하고 폭행하는 손이 아니라 순수하기 그지 없는 믿음의 손이었습니다. 거칠어 지고 주름이 든 손일 망정 믿음 때문에 아름다운 손이었습니다. 반대편에 예수님의 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소녀를 향해 기꺼이 손을 내미셨습니다. 하혈병을 앓던 여인으로 인해 힘이 나갔지만(마르코 5,31), 그럼에도 소녀에게 가셨고, 소녀의 아버지를 위로 하셨으며, 마침내 그 위대한 손을 뻗치셨습니다.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마르코 5,29)그 손은 인류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을 아름답기 그지 없는 구원의 손이었습니다.
성전은 구원의 손과 믿음의 손이 만나는 곳입니다. 구원의 손과 믿음의 손이 서로를 꽉 쥡니다. 누구도 땔 수 없는 힘으로 마주 잡습니다. 그 힘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인해 우리의 지치고 나약한 손은 한없이 아름답고 고귀한 손에 이끌려 끝없이 하늘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상상치 못할 그 깊고 맑고 아름답고 신비스런 장소로 말입니다.
회개의 장소
“죄 짓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열왕기 상권 8, 46) 실로 죄 없이 살아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를 끊임없이 감추며, 힘 없는 사람들을 억누르고, 하늘과 자신을 기만하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결국 구원의 손을 놓고 맙니다. 반면에 성전에서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18,16-18) 라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던 세리와 실상은 먹고 살기 위해 돌아 왔건만 뜻밖에 반겨 주시는 아버지 앞에서 통회의 눈물을 흘렸을 탕자(되찾은 아들의 비유; 루카 15,11-30)는 용서를 받습니다.
값비싼 향유와 하염없는 눈물을 쏟아내며 지쳐 있던 예수님의 발에 입맞추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내던 그 죄 많은 여인은 마침내 평화를 얻었습니다(루카 7, 36-46 참조).“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 46) 예수님의 이 한 말씀으로 여인은 구원을 얻습니다. 이는 그간의 모든 고생과 설움, 압박감과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순간이자, 영원의 문으로 들어 서는 기쁨과 승리의 순간 이었습니다.
회개에로의 요청은 목이 베어 쟁반에 담겨져 피 흘리기까지 외쳐대던 세례자 요한의 절규이자 초대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에 그 어떤 누구인들 회개 없이 갈 수 있겠습니까? 회개는 우리가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 들이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자 매번 성전에 발을 들이는 첫 번째 예식이기도 합니다.
정의의 장소
“누구든지 이웃에게 죄를 짓고 자신에게 저주를 씌우는 맹세를 하게 되어,이 집에 있는 당신 제단 앞에 와서 맹세하면, 당신께서는 하늘에서 들이시고 행동하시어, 당신 종들에게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그리하여 죄 있는 자에게는 유죄 판결을 내리시어 그의 행실에 따라 그 머리 위로 갚으시고, 의로운 이에게는 무죄 판결을 내리시어 그 의로움에 따라 그에게 갚아 주십시오.”(열왕기 상권 8, 31-32) 인류가 창조된 이래 정의의 이름으로 온갖 악행이 자행되었었고, 그 죄의 역사는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을 열고서 구세주께서 내려 오시어 죄 많은 인류를 심판 해 주시길, 제발 우리 곁에서 악인을 거두어 주시길, 그렇게 많은 사람이 절규하며 기도 했었고, 그토록 많은 사람이 억울함으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입으로 정의를 말하고는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는 오직 한 분,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 한 분에게서만 옵니다.인간이 창조주의 모상으로 창조 되었기에, 어느 정도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있고,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여전히 진정한 정의는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다 이해 하지는 못하는 그 깊은 신비 속에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 에서도 이루어 지도록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바로 정의이며 평화입니다. 정의로운 심판은“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열왕기 상권 8, 39) 하느님의 몫이며, 우리의 몫은 그저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일 겁니다.
용서의 장소
“이 땅에 기근이 들 때, 흑사병과 마름병과 깜부깃병이 들거나 메뚜기 떼와 누리 떼가 설칠 때, 적이 성읍을 포위 할 때, 온갖 환난과 온갖 질병이 번질 때,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 개인으로나 전체로나 저마다 마음으로 고통을 느끼며, 이 집을 향하여 두 손을 펼치고 무엇이나 기도하고 간청하면,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으시어 용서해 주시고 행동하십시오.”(열왕기 상권 8, 37-39) 하느님의 용서가 없이는 온갖 환난과 질병에서 벗어 날 수 없으니, 개인이든 국가든 도무지 당신의 용서 없이는 이 고통에서 벗어 날길 없으니,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는 이가 어찌 솔로몬 혼자 뿐 이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손발이 찢겨 가는 고통 속에서도 죄인의 용서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 34)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 이십니다. 따라서 용서 받을 일도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용서를 강조 하셨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에게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 지 너무나도 분명히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 할 것 없이 용서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용서받음 없이는 참된 행복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남을 용서 하는 데는 너무나 인색합니다. 용서에 인색한 이유에는 용서 하고 나면 마치도 자신이 받아야 할 빚을 더는 받지 못 할 것 같은 심리적 불안감도 한 몫을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무서운 이기심이 자리 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신은 정작 만 탤런트를 탕감 받고서도, 고작 백 데나리온 을 갚지 못한 동료의 멱살을 잡는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매정한 종의 비유;마태오 18, 23-35 참조).
용서 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지켜 나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속에 불행이 싹 틉니다. 오직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외로움의 늪에 빠져 들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외톨이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공동체는 끊임없이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베풂으로써 함께 건강해 지는 길을 모색합니다.
감동의 장소
솔로몬과 온 백성이 공을 들여 세웠던 성전이 함락 당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또다시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 시대에, 마침내, 바빌론 강가에서도 그리고 꿈에서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 옵니다. 폐허가 된 고향에서 그들을 기다려 주던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성벽을 재건하고 마침내 제 이차 성전이 완공 되어 하느님께 봉헌 하는 예식을 치르게 됩니다. 성경은 그 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습니다.
율법 학자 에즈라는 이 일에 쓰려고 만든 나무 단 위에 섰다…에즈라는 온 백성 보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그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책을 폈다. 그가 책을 펴자 온 백성이 일어났다. 에즈라가 위대하신 주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였다…느헤미아 총독과 율법학자며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은 온 백성에게 타일렀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온 백성이 울었기 때문이다. 에즈라가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레위인들도 ‘오늘은 거룩한 날이니, 조용히 하고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하며 온 백성을 진정시켰다. 온 백성은 자기들에게 선포된 말씀을 알아들었으므로, 가서 먹고 마시고 몫을 나누어 보내며 크게 기뻐하였다.”(느헤미아기 8, 4-12)
언제나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며 살라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는 결코 그가 살았던 환경이 기쁘고 감사할만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정반대였습니다.바오로 사도는 육체적으로도 말로 다하지 못할 고통을 겪고 있었으며, 끔직한 박해와 협박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기쁠 수 있었고, 감사 할 수 있었던 것은,무한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 으면서 부터였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의 백성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마지 않았던 그 위대한 율법 마저도 뛰어 넘는 구세주를 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2, 19) 말씀 하신 그분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전이셨고, 정녕 성전보다도 비교할 수 없으리 만치 위대하신 분이셨습니다.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은총을 베푸십니다.하느님의 은총은 우리가 그 어떤 처지에 처해 있더라고 항상 기쁘고 감사하고 기도하게 만들어 줍니다. 어떤 마술적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무조건적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신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감동을 주고 기쁨을 줍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무조건 감사하며 감동 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배움의 장소
성전은 또한 하느님의 학교이기도 합니다. 사랑을 배우고 실습하며 더 큰 사랑을 익혀가는 사랑의 학교입니다.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성체 성사를 세워 주시던 그 분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불타는 사랑이셨습니다. 그분은 어쩌면 불이 붙고 있지만 타지 않는 떨기와도 같습니다. 활활 모든 것을 사랑으로 태우셨지만,절대 없어지지 않으며 부활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미천한 우리에게까지 나누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사랑을 가르치고 계시며, 언제나 앞에서 이끌어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코 8, 34-36)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 25)
이 모든 말씀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부정 없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사실 자기희생 없이 이루어 지는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사랑을 배우고, 또한 그 사랑을 우리 후세에 물려 줄 책임과 더불어 큰 영예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말입니다.
나눔의 장소
사랑을 가르치시고 몸소 실천하신 예수님의 마음은 다름아닌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으며, 그 사랑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고 싶으셔서 였습니다. 그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류를 지어내셨으며, 그래서 내려 오셨고, 철저한 배반으로 목숨까지 잃으셨건만, 다시 살아 나셔서 이번엔 빵의 형태로 내려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십니다.
어쩌면 십자가에서 당하셨던 것 보다 더 큰 모욕을 받으실 수도 있으시지만 개의치 않으십니다. 하느님 이셔서 그렇기도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의 사랑은 그 본성상 그런 것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 길이와 너비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다. 솔로몬의 표현대로 “하늘 위의 하늘도 모자라며,”(열왕기 상권 8,27) 온 우주라 할 지 언정 어찌 감히 조금이나마 담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일부를, 오직 조그만 한 부분만을 그저 어렴풋이나마 가늠할 뿐입니다.
마태오 쿰!
사랑하는 마태오 성당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같은 시간 같은 공간으로 불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일 미사를 드리러 오면서 매번 일상성의 신발을 벗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웃 형제 자매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성성 때문에, 이웃 형제 자매 앞에서 마저 도, 매번 우리의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신발을 벗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우리에게 참 기쁨과 행복을 주시고자, 우리에게 당신의 얼을 담으시고자 그렇게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고 또한 믿음이 약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말며 믿읍시다. 그 손을 그 마음을 주님께서는 잡아 주시고 일으켜 주시고 들어 높여 주십니다.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마르코 5, 41)그 말씀에 열 두 살의 소녀는 씻은듯이 병을 털어 내고 일어 날 수 있었습니다. 십 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마태오 교우 여러분, 다시금 일어 나십시다. 마태오 쿰!
우리가‘마태오 쿰!’을 외칠 때, 이는 단순히 우리 자신만의 회복이나 구원을 의미 하지는 않습니다. 먼저 우리는 성전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반드시 다시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 다음에는 밖으로 반드시 나가야만 합니다. 구원자이신 그분은 마치 우리의 심장과도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는 먼저 그 뜨거운 심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야 하고, 반드시 힘차게 다시 나와야만 합니다.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고,그렇게 온 인류가 건강해 지도록, 다시 한번, 마태오 쿰!
김 지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