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마태오 성당 탄생에서 현재까지”
-10주년 기념 특별 좌담회-
일시: 2013년 8월 11일(일) 오전 9:30 부터 오후 1:30
장소: 신부님 사제관
참석자: 1. 김 프란치스코 (1대 사목회 부회장, 2대 사목회 회장)
2. 권 요셉 (1대 사목회 총무)
3. 임 가브리엘 (2대 사목회 부회장)
4. 이 베르노 (2대 사목회 총무)
5. 홍 미카엘 (3대 사목회 회장)
6. 조 크리스티나 (3대 사목회 부회장)
7. 임 카타리나 (주일학교 교장)
진행자: 하 라디슬라오
서기: 박 리디아
성 마태오 성당의 탄생과 성장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10년전 성삼 성당에서 분리된 이후 현재의 터헝가 지역에 자리잡기 전까지는 성전을 마련하기 위한 이동과 갈등이 반복된 힘든 시기였다. 10주년을 맞아 당시의 발자취와 주님의 은총이 내려지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참석자들의 기억에만 의존한 기술이다. 희미한 기억을 최대한 되살려 진술했지만 일부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추후 수정과 보완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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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자: 먼저 최대한 충실하게 말씀하게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기에 일곱 분들을 모셨는데10년이란 의미가 여기에 모신 일곱 분들께는 특별하실텐데 간단하게 소개나 느낌을 말씀하면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네, 반갑습니다. 10주년 기념 좌담회를 준비하시고 우리 성당의 10년 역사를 편찬한다고 생각하니까 흥분되기도 하고 또 앞으로 성당의 역사를 남길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하니까 이자리가 많이 기대됩니다.
미카엘: 성삼에서 분가해서 나온 지가 어제 같은데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 지나간 날들을 돌이켜 보니까 그동안에 저희 성당에 많은 발전도 있었고 또 고통도 많이 있었지만 앞으로의 10년을 준비하는 과정과 미래를 위한 좋은 말씀들을 나누셨으면 합니다.
가브리엘: 우리가 벌써 10주년이 됐는데요 제가 부회장직을 맡았을 때는 저희 성당이 한 5년정도 지난후였을 거예요. 그리고 또 인카네이션 쪽으로 내려와서 제가 부회장직을 시작했었는데 어려움이 참 많이 있었고 정말 가족같이 함께 했던 식구들이 그당시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거든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 지금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크지는 않지만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이 곳에 모여들었고 여기서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이 현재 흐뭇합니다.
크리스티나: St James성당에서 인카네이션으로 갈 때는 정말 암담했었던 것 같아요. 마치 광야로 내몰린 듯한 느낌이었고 가족같은 신자들의 마음이 흩어지는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어요. 그런데 성 마태오 성전을 건립한다고 했었을 때 그땐 우리가 우리 성전을 구입해야 된다는 생각보다 우리의 마음을 합쳐야 된다는 생각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기뻤고 과정을 겪으면서 현재 우리 성당은 많은 발전을 했고 또 그 안에 있는 신자들이 좋은 모습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마태오의 한 일원으로서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셉: 요즘은 성당에 오면 제가 아는 사람들보다 모르는 분들이 더 많아요. 그만큼 새로운 얼굴들이 많다는 것은 성 마태오 공동체가 많은 성장을 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구요. 우리 공동체의 오늘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다시한번 나누게 된다면 우리 모두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오늘 이 좌담회가 굉장히 좋은 기회인것 같아요.
베르노: 오늘 이자리에 들어와서 좌담회를 시작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거예요. 첫번째는 기뻐서 그렇고 10년이 되면서 이룬 것도 많고 가슴 아팠던 일도 많아서 눈물이 핑 돌아요. 어떻든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고 주님께서 마련하셨던 것이라 생각해 볼 때 우리는 항상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공동체가 아닌가 생각 합니다.
카타리나: 저희는 밑도 끝도 없이 신부님이 공동체가 분가 한다, 네가 주일 학교를 맡아라 하셔서 생각지도 않게 주일 학교를 맡게 되었고 처음 시작할 때는 국민학교 아이들부터 할수도 없고 장소도 없고 그래서 중고등부반 3개만 가지고 시작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Pre-K부터 고등부까지 13개의 반을 두고 있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10년 전에도 있었던 교실 부족이란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부정적인 의미의 문제는 아니고요 그만큼 아이들이 더 많이 자라고 많이 있기때문에 항상 부족한 상태인것 같아요. 제가 무엇보다도 정말 감사한 것은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대한 열정, 사랑이었기 때문에 주일학교가 계속 발전 할 수 있었던 것 같고요. 제가 바라는 것은 우리 아이들이 자라서 고등부를 졸업하고 대학이나 사회로 나가서도 성 마태오 졸업생으로 씩씩하게 자기들의 신앙 생활을 잘 할수 있기를 바래요.
진행자: 우리 공동체의 오늘이 있을때까지 광야에 내몰린 듯한 느낌을 받을 만큼 많은 역경이 있었는데 그당시 그렇게 성삼에서 분리를 하게된 상황은 어떤것 이었습니까?
프란치스코: 성삼 성당 4대 주임 신부님이셨던 정 마르코 신부님부터 6대 장 신부님이 부임하실때까지 성당 이전에 대한 여러가지 시도가 있었으나 별 진전이 없었고 장 신부님이 오신후 마침내 성당 주변 주택 4채를 구입하게 되었지요. 그 사들인 집들을 허물어 회관도 증축하고 파킹랏도 만들고자 했는데 Zoning문제에 걸려 계획에 차질을 빚고 있던 와중에 그당시 성 제임스 본당 신부님이셨던 Bob 신부님께서 제임스에서도 한국 미사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가 비공식적으로 장 신부님께 전달되었고 신부님과 봉사자들이 Bob 신부님과 수차례 접촉하여 결정이 된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당시 성삼에선 주차장이 좁아서 항상 불편하고 힘들어 했는데 여기 제임스는 파킹랏도 넓어 이쪽 지역 신자들은 좋아 했던것 같고, 성삼 신자들은 봉사자와 재정적인 문제에 많은 우려를 했던것으로 기억되는군요.
가브리엘: 그 당시에 이쪽 지역 반이 아주 활동적이었는데 그분들이 이제는 이쪽 지역에 한인 공동체가 하나 생길 필요가 있지 않나하고 가능성을 타진하는 과정에 성 제임스 미국 성당하고 접촉을 하면서 우리 공동체 태동이 시작되었던 것 같아요. 대부분 반장들, 단체장들, 그리고 봉사자들로 구성되었던 신앙학교를 다니면서 이야기 들은 바로는 장 신부님께서도 시기적으로 때가 됐다고 생각하시어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분가 결정을 하게 된것으로 알고 있어요. 성삼 성당은 우리 공동체 분가이후 모든 경비를 줄여가며 한 3년 정도는 너무 힘들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때 상황을 알 수 있을것 같아요.
프란치스코: 평협회의에서도 의견이 다 달랐고 장 신부님도 교우가 빠져 나가면 아무래도 재정적으로 힘들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신부님은 “신자들이 빠져 나가는 만큼 다 채워 주실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라” 라는 말씀을 하셨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당시 성삼 성당의 현금 잔고의 반인 오만불 정도를 우리 공동체에 나누어 주는 어려운 결단도 내리셨지요.
진행자: 그런데 성삼에서의 분가결정은 교우들의 자발적인 의견 수렴에 의한 결과라기 보다는 그당시 사목회 봉사자들과 신부님의 결정인것 같은데 교우들의 여론 수렴은 전혀 없었습니까?
프란치스코: 제가 기억하기로는 그당시 신자들의 사전 여론 수렴은 없었고 사목회에서 교구에 허락받고 장 신부님이 결심 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카타리나: 공식적으로는 없었는데 저희 반 같은 경우는 반 모임을 할때 그런 얘기가 솔솔 나오긴 했어요. 이쪽 지역에도 한인 공동체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사실 분가를 하게되면 결과적으로 신자수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고 늘어나게 돼 있다. 그런 생각에서 이쪽 지역에 한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라고 저희 반에서는 그런 이야기들이 솔솔 가끔씩 나왔었어요. 그 원인은 성삼 신자수가 많아 파킹장이 좁고 불편하고 하니까 이쪽 지역에 한인 공동체를 만들어 나누면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기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진행자: 그럼 교구에서 승인해준 배경에은 어떤것들이 있을까요?
베르노: 제가 알기로는 교구에서 Center로 성장하는 한인 공동체에 많은 관심이 있었고 한인 공동체와 영어 공동체가 어떻게 어울려서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하는 Pilot 프로젝트를 가지고 우리 공동체를 허가를 해 준것으로 알고 있어요.
요셉: St James 본당의 이해와도 맞았던게 당시 본당이 재정적으로 힘들었던 상태라 우리 한인 공동체를 수용하므로써 성 제임스 본당에도 재정적으로 도움이 될것이다고 하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아요.
진행자: 이쪽 지역에 사는 일부 교우 분들은 안 올라오고 성삼에 남아있는 분들도 많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에?
요셉: 일단 올라오고 난 다음에 나중에 다시 내려가신 분들이 계시죠. 장 신부님이 직접 교통정리를 하셨기 때문에 신부님이 계시는 동안에는 해당되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일단 올라왔어요.
프란치스코: 그 때도 미사는 성삼으로 갈 수 있었지만 이쪽 지역 신자들은 자동적으로 교적이 성 야고보 한인 공동체로 옮겨진 것으로 알고 있어요.
베르노: 진행자 말씀대로 그 당시 안 온 사람들이 있어요. 누가 안 왔냐하면 학생들이 안 왔어요. 이유는 서로 자기들만의 유대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부모 교적을 따라 우리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지만 학생들은 성삼에 남은 거예요. 아마 교장 선생님도 이 상황을 잘 이해 하실 겁니다.
카타리나: 네. 그 이유는 아이들이 성삼에서 함께 자랐잖아요. 그런데 성삼에서 분가하면서 부모님들은 옮겨올 수 밖에 없었지만 애들은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을 싫어했을 거고 그때문에 아마 부모님들이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 국민학교 아이들은 부모님 따라 여기로 와도 중고등부 아이들은 아마 거기로 데려다 주셔야 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도 미사는 이쪽에 오셔서 봐야 하고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이 공동체를 잘 지켜 낼수 있었던 것은 신자들이 우리 공동체에 대한 주인 의식 때문일거야요. 여기서 초등학교를 보낸 아이들은 이제 중고등부를 맞으면서 내가 성 마태오 일원이구나하는 소속감과 유대가 생기는거죠.
크리스티나: 제 아들같은 경우도 복사였는데 제임스에 복사가 턱없이 부족하니까 복사 당번인 날은 제임스에서 복사 서고 당번 없는 날은 성삼을 가야 했어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아이들이 성당을 두 군데를 다녀야 했어요.
카타리나: 누구의 아이든 상관 없이 대부분의 아이들이 모두 그렇게 했었던 것 같아요. 거의 80% 이상의 아이들은 두 군데를 왔다 갔다 했고 나머지 20% 정도만 여기에서 있었던 것 같아요.
진행자: 그 당시 우리 공동체 교우분들은 몇분이나 되셨습니까?
요셉: St James성당으로 올라올 때 가구수로는 한 250여 가구 되는데 실질적으로 나온 가구는 150여 가구 정도 였던것 같아요. 정확하게 기억은 안되지만 애들까지 대략 250명 정도 올라 왔던 것 같아요.
진행자: 250명이요? 10년이 지난 지금과 비교해도 그리 적은 신자수는 아니네요. 그동안 신자수가 많이 증가되었나요?
요셉: 많이 증가한 셈이죠. 우리가 10년을 오는 과정에서 그당시의 250명이 계속 공동체에 남아 계신것이 아니라 많은 분들이 떠나시기도 하고 또 새로운 분들이 오시고 해서 현재는 280여 가구, 애들까지 포함해서 약 450명 정도나오시는 것 같아요.
프란치스코: 언뜻 보면 처음 올라올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배는 되는 것 같네요.
베르노: 그 때 분리 될 땐 교우 가구수는 그렇게 됐지만 성당에 안나오는 가구도 많이 있었잖아요..
진행자: 왜 성당에 안나오는 가구수가 많았습니까?
요셉: 분리됨과 상관 없이 교적 정리가 안된 상태에서 왔기 때문에 장부상엔 이쪽에 사시는 교우들이 많았는데 실질적으로 성당에 나오신 성인 신자들은 200여 명정도였던것 같아요.
가브리엘: 신자들이 이동하는 과정에 있어서 저같은 경우는 성삼 초창기부터 다녔는데 어느날 갑자가 분가를 했으니 성 야고보로 올라가라 하시는데, 저와 오랜시간을 함께 했던 동료들이 성삼에 있는데 그냥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았었어요. 그래서 한동안 성삼을 나갔는데 신부님께서 왜 성 야고보에서 미사 참례 안하고 성삼으로 내려 왔느냐고 호명까지 하시면서 지적을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익숙해져 있던 성삼을 왜 갑자기 떠나야 하는지 갈등이 생겨 한 일년 쯤은 집 근처에 있는 다른 성당에서 영어 미사를 드렸어요. 그러다가 어느날부터 성 야고보로 나가기 시작했는데 아마 많은 분들이 저같은 생각을 하셨을 거예요.
진행자: 어떻게 보면 그 당시가 혼란 상태인데 초대 주임신부이신 장 신부님께서 중점을 둔 사목 방향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요셉: 초창기였으니까 일단은 분가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는 것 이었겠지요. 그때 장신부님의 임기가 6개월 남짓밖에 남아있지 않았었고, 신부님은 성삼과 우리 공동체 양쪽을 오가시며 분가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시려고 많은 노력을 하셨지요.
진행자: 성삼에서 분리된 이후에 성 제임스 본당의 영어 공동체와 융화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힘든 일이 많지 않았습니까?
베르노: 우리가 그때 St James 성당에서 한 5분정도 떨어져 있는 Foothill 회관에 있었는데 St James본당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있는 본당내Annex 건물로 들어오는것을 허락을 해줘서 신나게 수리해서 이사 하게 됐지요. 이때는 아마도 교구에서는 우리가 잘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거야요.
요셉: 우리는 미사참례 후에 여러 단체 활동이나 각종 모임을 통해 신앙생활을 하는 반면에 영어 공동체는 미사만 참례하고 개별적으로 활동이나 신앙생활을 하기때문에 우리가 왜 회관을 필요로 하는지를 St James 본당 신부님이 처음에는 이해하지를 못했던것 같아요. 우여곡절끝에 Bob본당 신부님 허락을 받고 Foothill에 위치한 사무실 건물 2층을 리즈해서 회관을 만들었고 신자들한테는 공동체를 시작하는데에 필요한 물품들을 도네이션 받아 시작을 하게 됐지요.
1년쯤 지나 St James본당내 Annex건물을 사용해도 된다고 허락을 해서 우리 회관 용도에 맞게 수리하고 이전하게 된거죠. 하나의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미국 본당에서도 수리비 10%정도를 내 주었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조심스럽게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려 노력했어요. 하지만 본당에서 생각하는 하나의 공동체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의 공동체의 의미가 많이 달랐어요. St James 본당은 재정적으로 One Account로의 하나의 공동체였지만 우리는 미국 성당안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는 하나의 공동체였어요. 그래서 성가대도 같이 연습하여 연합 미사도 여러차례하고, 애들 견진성사 Class도 본당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같이 준비하고, 여러가지 본당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고…
한인 공동체는 대부분이 신자들의 무료나 실비봉사로 이루어지지만 미국 성당은 정식으로 월급을 받는 봉사자로 운영되거든요. 본당도 그당시 약 50만불의 일년 예산의 절반이 인건비 였어요. 진정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월급을 받는 모든 봉사자들을 이중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거나 그들과 같은 혜택이 한인 봉사자들에게도 동등하게 주는 계획이 있었어야 했는데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조건 One Account 만을 원했기 때문에 가능하지가 않았던 거지요. 결국 교구와 St James 본당의 한인 공동체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동상이몽을 가졌던것 같습니다. 하나가 되려는 목적은 같지만 방법이 달랐던 것이 하나가 될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나 생각 듭니다.
카타리나: 전체적으로 제가 봤을 때는 양측 공동체 리더들이 이 Pilot 프로그램에 대해 제대로 된 인식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노력을 해볼 것인지 조차도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도 않은 채, 동상이몽이라고 말씀을 잘 하셨는데, 그 미국 공동체에서는 한인 공동체가 들어옴으로써 어떤 Benefit이 있을거다 라는 생각을 가졌었고 저희쪽에서도 넓고 좋은 성당을 쓸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만족하고 한 공동체가 되어 가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이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요셉: 한인 공동체의 사목회에 해당하는 본당 Pastoral Council은 1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우리 공동체에서도 두명이 참석하면서 하나의 공동체를 위한 소통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그 생각의 차이를 줄이는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한인 공동체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St James 본당에 적절한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없이 우리 공동체가 재정적인 것을 포함해서 있는 그대로의 St James 본당에 흡수되기를 바랬으니까요.
진행자: 제 기억에 당시 교무금은 한인 공동체가 사용하고 미사 봉헌금은 St James본당에 주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St James 본당과 재정적인 문제는 없었습니까?
요셉: 우리가 St James성당으로 옮겨 가면서 미사 봉헌금은 일단 모두 본당에 주고 차후 어떻게 나누어 쓸것인가를 결정하기로 했는데 몇달을 지내고 보니깐 본당 입장에서 우리 미사 봉헌금이 $1500-1700정도였는데 기대보다 절대적으로 적은 거야요. 그래서 미사 봉헌금에서 한인 공동체를 지원은 안하는 것으로 되었지요. 정 신부님이 부임하시고 나서 여러가지 이유에서 미사 봉헌금을 매주 $2000씩 주기로 했죠. 결국 비용을 지불하고 성당과 회관을 빌려쓰는 그런 이해관계가 Bob 본당 신부님과 성립이 된거죠. Bob 신부님은 서두르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한인 공동체를 이해하고 적절한 방법을 찿을때까지 기다린다는 쪽이었는데 건강상 이유로 계획보다 빨리 은퇴를 하시면서 상황이 변하게 된것이지요.
베르노: 교무금 얘기가 나와서 말씀드리는데 우리는 교무금이라는 것이 있지만 미국 본당에는 교무금이라는 개념이 없어요. 그래서 St James 본당에서는 우리 교무금을 봉헌금으로 간주해 버린거죠. 한인 공동체에 대한 예산집행에 대한 본당의 방안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 공동체의 입장은 다른 한인 공동체가 하고 있는것처럼 교무금은 우리 공동체가 관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고... 그래서 새로 본당 신부님이 오시면서 One Account에 대한 갈등이 증폭되었던것 이지요.
진행자: 그랬다면 결국 따지고 보면 근본적인 문제는 금전적인 것이었고 또 St James 본당 신부님과의 문화적인 차이가 컸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카타리나: 그러니까 대화 소통이 리더들 선에서 없었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소통하자는 노력이
부족했기때문에 한번 상태가 벌어지니까 점점 더 벌어지는 쪽으로 상태가 악화 되지 않았었나 싶어요.
프란치스코: 그당시 사목회 입장에서 보면 마지막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했고 마지막 하나, 본당에서 원하는One Account에 대한 적절한 방법을 찿고 있는 동안 LA교구에서 신부님께 한인 공동체는 St James성당을 떠나라는 통보가 일방적으로 오게 된거지요.
진행자: 일방적인 통보를 받은후 어떤일이 있었는지요?
프란치스코: 그때 신자들 사이에서도, 사목회에서도 갈등이 많이 생겼어요. 그래 가지고 교구에 가서 얘기도 해보았고 사목회에서도 심각하게 논의했죠. 사실 사목회에서도 의견이 반으로 쪼개 지고 해서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성삼으로 다시 돌아갔죠. 일부는 교구에서 지시하는대로 따르는 것이 신자된 도리다 였고 또 일부는 이것을 못 받아 들인다 해서 그 때 반대하는 리본도 달고 그 때는 공동체안에 갈등이 이미 조성되고 있었어요.
진행자: 그런 얘기를 더 깊숙히 하기엔 적절하지 않지만 한인 공동체의 신부님과 본당 신부님과의 갈등이 공동체간의 융화에 걸림돌로 작용한 부분은 분명히 있네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브리엘: 저는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해요. 제 생각은 주인과 관리인에 비교를 하고 싶은데요. 문제는 재정적인 갈등에서 발생이 됐지만 양쪽 공동체의 고통을 서로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지 않았느냐. St James본당의 고충, 우리 공동체의 고충 이런 것들이 대화 부족에서 생겼다고 보는데 저는 주인과 관리인 관계처럼 관리인은 주인이 원하는대로 최선을 다해 해준다고 해도 주인이 맘에 들지 않으면 그 관리인을 나가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하느님의 눈으로 봐야 하는데 너무 인간적으로 소화를 시키려고 하는데 주인과 관리인의 모습이 나오지 않나하는 생각이 드네요.
진행자: 개인사에 비교해도 이십 년, 삼십 년 따로 살던 분들이 결혼해서 한 집에서 살면 상당한 갈등이 있는 것이 당연한 거고 민족을 역사로 봐도 수백 년 수천 년 다르게 살아왔는데 당연히 융화되는데 어려움이 있을 거라는 예상을 했어야 하는데 소통의 문제점이나 한인 공동체만의 배타성은 없었나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셉: 3대 주임신부님으로 이중 언어가 가능한 LA 교구의 정 신부님이 오시고 난 다음에는 소통의 문제는 없었을 거라 생각해요. 처음 우리가 이쪽으로 옮겨오면서 St James본당의 이름을 한글로 번역하여 성 야고보 한인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시작을 했지만 정 신부님이 오신 후에 St James 본당과 한 공동체로 만들어 나가는 일환으로써 우리도 그대로 성 제임스로 표기하자는 의도로 명칭이 변경되었죠. 정 신부님도 처음에는 St James본당과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려고 노력을 많이 하셨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인 공동체를 좀더 이해하시고 영어 공동체와 한인 공동체 문화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보시지 않았나 생각 돼요. 성 제임스 한인 공동체로 명칭을 바꾸셨을 땐 본당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였다면 성 마태오 한인 공동체로 바꾸셨을 땐 한인 공동체가 독립이 요구될때 였다고 생각을 해요.
베르노: St James본당에서 나가라 했을때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St James본당 소속이 아니다 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한인 공동체만의 이름을 가져야 된다” 그래 가지고 성 마태오로 바뀐건데 그것도 우리 공동체 창립일인 9월 21일의 주보 성인이 성 마태오라 이름을 주보 성인 이름을 따라 성 마태오로 바꾸게 되었지요.
진행자: 좀 다른 이야기는 없습니까? 그 당시에 한인 공동체의 소통 노력이 단순한 언어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노력들이 부족했었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카타리나: 서로가 부족했던 것을 채우는데 너무 급급했었던 것 같아요. 그 때 우리 공동체가 초창기 시기였기 때문에 홀로서는 데 모든 것을 다 쏟은 거예요. 그래서 본당과 함께 일을 하자는 거기까지 여력이 안미쳤다고 저는 생각해요. 저는 지도자들이 조금 더 힘을 더 했더라면 충분히 역사를 바꿀 수 있었을 여지는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당시를 겪었던 많은 분들이 우리도 충분히 노력을 하지 않았구나 라고 지금은 느끼고 있어요. 저희도 이것이 Pilot 프로그램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어요. 미국 신자들도 나중에 알고 나서 지금까지 가슴 아파하고 있어요.
프란치스코: 시기적으로 장 신부님 떠나시면서 후임 신부님에 대한 이슈가 있었어요. 마침 마산 교구 소속인 김종훈 신부님이 당시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계셨는데 사목을 보실수 있다 하셔서 Wilkerson주교님께 추천해서 2대 주임신부님으로 오시게 되었으나 갑작스럽게 조기 귀국을 하시게 되었고 후임으로 LA 교구의 정 신부님이 St James본당 보좌신부로 발령을 받으셨지요. 정 신부님이 오시는 과정에서 오해도 있었지만 공동체의 이름을 성 제임스로 바꾸는등 많은 노력을 하시면서 한국어 주일 미사 시간도 오전 중심미사 시간대로 바꾸셨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이 영어 공동체를 자극하는 시작이 아니었나 생각이 되네요. 또 그 때 무슨 앙케이트 같은 설문지 조사를 했었는데 그것이 아주 중요한 사건이 되어버렸지요.
요셉: 그것이 뭐냐면 영어 공동체 주임신부님이셨던 Bob 신부님이 은퇴하실때 쯤 One Account를 갖고 본당과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방안을 찿고 우리 공동체의 나아갈 길을 찿기위해 한인 신자들의 의견을 묻는 앙케이드 조사였지요. 신자들의 의견은 정 신부님이 본당 신부님이 되시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결론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Wilkerson주교님께 보고서를 드렸으나 LA 교구의 결정은 다른 것이었죠.
프란치스코: 그당시 정 신부님과 에디 신부님 두분이 본당의 보좌 신부님으로 계셨는데 LA교구는 에디 신부님을 본당 신부님으로 발령을 냈고 에디 신부님은 본당 신부님이 되신후 조금 있다가 한인 공동체를 폐쇄한다고 발표를 하셨어요. 우리가 St James 성당을 떠나기전에 심한 고통을 겪었잖아요. 그 과정에서 정 신부님이 삭발까지 하시고 신부님으로서 심각한 위기상황이 아니었나 싶어요. 한인 공동체를 없애라 하니까 우리 사목회하고 새 본당 신부님하고 여러번 논의를 했었어요. 정 신부님이 양보를 하셔서 “나는 떠나겠다 하지만 한인 신자들은 남아 한국 미사는 하게 해달라”고 새 본당 신부님께 말씀을 드렸는데 새 본당 신부님은 아주 완강하게 한국말 미사뿐만 아니고 한국말로 하는 그 어떤 활동도 할수 없다고 하시면서 정 신부님의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무조건 다 폐쇄하라고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방법이 없잖아요.
진행자: 그럼 새 본당 신부님이 되신 에디 신부님께서 한인 공동체를 근본적으로 인정을 않겠다는 말이였네요?
프란치스코: 그렇죠. 그러니까 그냥 영어 미사로만 해라 라고 하신거예요. 그래서 방법이 없어서 St James 본당을 떠나는 수 밖에 없다고 결정한 거예요. 당시 성삼하고의 재결합도 고려해 보았지만 잘 안되었고 어차피 St James를 떠날거면 빨리 떠나자 해서 짧은 기간 안에 나가기로 결정하고 추진하게 된 거예요.
베르노: 우리가 St James본당과 새해 1월 1일부터 합치기로 하고 모든 account또한 1월 1일 부터 합친다 그랬는데 12월 중순경에 “합치는거 원하지 않는다면서 언제까지 나가라” 라고 이렇게 됐던 거예요. 그때 우리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이사할 성전을 찾아다니던 중에 Wilkerson 주교님이 글렌데일 인카네이션 성당에 교회건물을 사놓은 것이 있는데 수리가 끝나서 거기를 쓸 수 있다고 하셔서 그곳으로 옮겨가게된 겁니다.
프란치스코: 당시 공문상으로는 지역 주교님이신 Wilderson주교님 이름으로 나가라는 통보가 왔기 때문에 주교님을 만나러 갔더니 우리가 제출했던 보고서를 보여주시면서 보고서 조항에 어떤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우리가 나가겠다라는 문구 하나를 보여주시면서 “너희가 나가겠다고 하지 않았느냐..교구에서는 나가라 마라 결정을 하지 않는다”고 말씀 하시더라구요. LA교구는 그 조건을 충족시켜줄 수 없었고 그것때문에 우리 공동체가St James본당을 떠나는 것은 우리들이 원한것이다 는 뜻이라고 그당시 이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베르노: 우리가 St James 본당을 나가게 되었을 때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Wilkerson 주교님이 다른 한인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독립된 한인 공동체로 인정을 해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성 마태오 한인 공동체로 바뀌고 Center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해주셨어요.
진행자: 그동안 저희들이 많이 노력했지만 실패로 끝났는데 또 공동체를 옮긴다는 게 큰 시련이라는 생각도 많이 했겠네요? 인카네이션으로 옮기는 과정과 옮긴후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요셉: 그래서 당시에 많은 신자들이 성삼으로 되돌아 가신 분들이 많았고 인카네이션으로 내려 간 신자들은 2/3 정도밖에 안되었죠. 그러니까 1/3이 성삼등으로 떠났거나 그대로 St James성당에 남으셨죠. 인카네이션은 우리가 쓸 본당 수리만 다 끝난상태였어요.
베르노: 우리가 거기 내려가서 신자들을 많이 잃었지만은 또 그 근처에 계신 새로운 신자들이 많이 들어 오셨어요. 그리고 아직까지고 계시고요. 그래도 우리가 그 좁은 공간에서 뭉치기를 잘 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7월 5일경에 내려가고 20일경에 준비되어 있던 패밀리 캠프를 했었는데 그때 구호가 뭐였냐면 “우리는 할수 있다 (We Can Do It)”이었어요. 그만큼 우리는 “We can do it”을 외쳤고 추수 감사절 미사를 하면서 “우리는 하나로” 라는 주제로 준비를 했는데 모든 신자들이 똘똘 뭉쳐서 너무 너무 잘해내었어요.
프란치스코: 당시 우리가 인카네이션으로 내려가기 전에 결정되어 있던 일이 우리 공동체가 추수감사절 야외미사를 주관하는 것 이었어요. 그래서 내려가면서 제일 큰 걱정이 이런 와중에서 어떻게 야외미사를 치루어 낼수 있을까 였는데 일치 단결하여 역대 최고의 행사였다는 찬사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행사를 치루고 나서 자신감을 갖을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지 않았나 생각해요.
가브리엘: 막상 인카네이션에 가서 봤더니 신부님 사무실로 쓸만한 방 한개와 교실로 쓸만한 작은 방 두개 정도만 있어서 주일학교나 레지오 모임을 할 만한 공간이 충분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불편하니까 아이들이 떠나는 거예요. 제임스에 있을 때 주일학교가 120명 정도 됐었는데 우리가 지금의 성전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65명 정도로 줄더라구요. 아이들이 떠나니까 부모도 함께 떠나게 되더라고요. 인카네이션 본당신부인 폴 신부님을 만나서 여기로 내려올땐 성당 체육관옆 교실을 쓰는 걸로 알고 왔는데 왜 못쓰게 하냐고 물었더니 성당쪽에서는 교실 사용이 환경 조건에 부적합하기 때문에 수리를 해야 한다는 거예요. 체육관도 처음에 두서너번 행사를 한후에는 체육관 자체도 못 쓰게 됐지요. 파킹랏도 10여대 주차공간 밖에 없었고 모든 면에서 불편하고 힘들어 지다 보니까 신자들도 점점 줄어들었지요. 처음엔 폴 신부님이 3년 계약을 해주겠다고 했는데 정작 계약서에는 매년마다 재계약하는 것으로 리즈 계약서에 되어있어 싸인을 보류하고 다른 장소를 찿아 보았던 것이지요.
요셉: 신자들은 공동체 자체가 그 쪽으로 옮겨 간다니까 그냥 쫓아서 와서 이런 자세한 얘기는 신자들이 몰랐을거야요. 또 그당시 우리는 재정적으로 새로운 성전을 건립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인카네이션으로 가서 삼년쯤 있으면서 재정을 확보해서 성전을 마련하자라는 생각으로 갔는데 처음 약속과 계약조건이 달라 싸인을 보류하고 있던중에 가브리엘씨의 노력으로 현재의 성 마태오 성당 터를 다시 보게 된거죠. 그리고 우리는 이런 사정으로 인카네이션으로 갈 수밖에 없었지만 성삼 입장에선 우리가 Glendale지역으로 옮겨오므로써 미묘한 이해 관계가 엇갈려 우리가 인카네이션에 오랫동안 머무를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였던 것 같아요.
가브리엘: 그 한 일년 정도가 마태오의 광야 생활이 아니었나 싶어요. 하지만 그 계기로 많이 성장 했어요 영적으로도 많이 성장했고요.
진행자: 그 당시에 각종 모임들은 어디서 하셨나요?
가브리엘: 누구네 집에서, 성당와서 한 쪽 구석에서, 또는 교무금 받는 사무실에서도 주일학교를 했었죠.
크리스티나: 그 때 레지오 팀이 일요일에 많이 있었는데 방이 없어서 일요일 레지오를 모두 평일 저녁 시간으로 바꿔야 됐어요. 그렇게 바꾸고 나니까 시간이 맞지않아 레지오를 그만두시는 분들도 생기고 주일학교도 그랬지만 룸이 없어서 단체가 모임을 갖을 수가 없었어요.
진행자: 그 열악한 상황에서 새로운 장소로 현 성 마태오 성당을 찿게된 과정은 어떠했습니까? 또 현 성 마태오 성당으로 옮겨오는 과정은 어떠했는지요?
가브리엘: 장소를 물색중 그 당시 평성교회였던 현재 성 마태오 성당 자리가 매물로 나와 있어 신부님께 말씀드렸더니 전에 사목위원들하고 오셔서 보셨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때는 St James 성당에 있었을 때니깐 이 평성교회터가 눈에 안들어 왔었겠죠. 파킹장도 충분한 것도 아니고 건물 자체도 오래됐고 했으니까요. 평성교회는 사정상 꼭 팔아야 하기때문에 리즈는 안된다고 해서 다른 곳을 물색했지만 리즈가 턱없이 비싸 포기상태였어요.
프란치스코: 평성교회로 결정하기 전에 여기저기 많이 가서 봤었어요. 건물도 보고 땅도 봤었는데 재정 형편이나 시간상으로 다른 선택이 사실 없더라구요.
카타리나: 저희가 제임스에 있었을 땐 넓은 공간에서 쾌적하게 생활을 했었을 때라 여기가 눈에 않들어 왔었죠. 그런데 좁고 열악했던 인카네이션에서 지내다 보니 무었보다도 인카네이션에선 밖으로 나오면 바로 큰 길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 다칠까봐 항상 마음을 졸여 왔었어요. 그리고 모임을 해야 하는데 모임을 할수 없는 현실에 부닥치다 보니까 지금 사용하고 있는 터헝가를 봤을 때는 너무 좋다라고 느낀거예요. 일년 전에 봤을 때는 눈에도 안차던 똑같은 건물이 광야의 생활과 눈물겨운 일들을 겪고 나니 새롭고 너무 좋아 보였어요.
가브리엘: 그 때 평성교회가 320만 달러에 나와 있었는데 그쪽은 팔아야 했고 우리는 살 돈이 없었고 해서 수차례 만나서 흥정을 하다가 일년 리스에 일년 후 구매하는 방법으로 합의되었고 일년후 구입 가격도 많이 깍았어요.
요셉: 인카네이션과 계약하기 전에 현 성전위치로 옮기는 것에 관한 모든것을 결정해야 했어요. 그래서 모든 봉사자들이 모여서 토의를 거쳐 투표에 부쳤는데 80%이상이 옮기는데 찬성을 하셔서 그 힘으로 결정을 할 수 있었어요.
진행자: 충분한 건축기금도 없는 상황에서 현 성 마태오 성당으로 옮겨오는 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텐데 어땠습니까?
요셉: 워낙 어려웠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냥 1년 리스하고 있다가 구입을 할 수 없으면 포기하고 또 다른데로 가지 뭐 이런 생각으로 시작한 것 같아요.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깐요.
가브리엘: 십시일반 우리가 많이 모았고 특히 어느 한 분이 익명으로20만 달러를 도네이션해 주셔서 많은 희망을 갖게 됐어요.
요셉: 우리가 여기 이사올 때 건물 자체를 As Is로 계약했지만 건물 상태는 도저히 우리가 그대로 사용 할수 없는 상태였어요. 그래서 고심을 하다가 그래도 신자들이 봤을때 실망감 들지 않을 정도로 기본적인 형태는 갖추자고 해서 왠만한 건 고치고 공동체를 옮겨온 거예요. 그 때 가브리엘 형제님이 건축 위원장을 맡아 수고 많이 해주셨고 건설회사를 하고 계시는 프란치스코 회장님이 여러가지로 수고 많이 하셨고 힘을 많이 보태셨어요.
가브리엘: 자기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한 십여 분들, 예를 들면 플러밍, 전기, 콩크리트 등 재능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그 덕분에 공사도 빨리 끝나게 됐고 비용도 많이 절약할 수 있었어요.
크리스티나: 몸으로 봉사 하신 분들이 정말 많았어요. 그래서 성모회에서 점심 제공을 해 드렸죠.
요셉: 주일 미사시간에 제대앞 지붕이 조금 내려앉는 아찔함도 있었죠. 보조 기둥을 세우고 몇주동안 안전 검사를 하고 안전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나 대대적인 지붕공사를 하는등 리즈 기간 1년동안 지속적으로 건물을 보수하면서 지금의 성전을 마련했지요. 아마도 보수하는데 20여만불 이상이 든것으로 기억해요.
진행자: 외부적으로 교우수는 많이 줄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더 단단해졌겠네요. 1년후에 구입하는 과정은 순조로웠습니까? 건축기금 모금에 대한 호응은 어땠습니까?
카타리나: 그렇죠. 2대 신부님이신 김종훈 신부님이 해주신 말씀이 교회는 너희들이 주인이다. 너희들이 하는 것이 교회의 역사가 된다라고 하셨었어요. 우리가 이렇게 여러 본당을 거치면서 광야 생활을 하면서 새 성전을 찾아서 우리 것을 만들어서 쓰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관여를 했잖아요.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 한 분 한 분이 여기가 내 집이다 내 공동체다 라는 주인 의식이 생기면서 그 어떤 외부적인 것에도 좌지우지 되지않고 내적으로 성장할수 있었던 것으로 봐요.
요셉: 인카네이션에서 현 성 마태오로 오는 과정에서 안오신 분들도 있고 일 년동안 건축 기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다른 곳을 가신 분들도 있었어요. 우리가 성전 기금을 모금할 때 목표가 200가구가 참여하는 것이었는데 그 당시 우리가 165 가구정도가 참여하셨어요. 우리가 당시 공동체 월간 소식지를 냈는데 지금 확인 해보니까 165가구중에 93가구가 그러니까 57%에 달하는 가구가 $3000 이상의 건축기금을 내어 주셨어요. 사실 우리 신자들 뿐만 아니라 외부 단체, 타 공동체에서 도와준 부분도 굉장히 커요. 우리가 특히 고맙게 생각해야 되는것은 성삼 성당 신부님과 신자들이야요. 우리 공동체가 성삼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형제애로 우리 공동체가 성공적으로 성전을 구입할수 있게 마지막까지 도와 주셨어요.
가브리엘: 에스크로 날짜는 다가오는데 돈이 좀 모자랐었어요 한 십 여 만 달러 정도. 그래서 너무 긴박한 상황이라 우리가 배 신부님을 찾아갔지요. 그것도 밤늦게. 그 돈이 없었으면 아마 에스크로 싸인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배신부님께서 성당 차원에서 무이자로 빌려 주시고 또 특별 헌금 수만불까지 모아 주셔서 무사하게 에스크로 닫고 성전을 구매 할수 있었던 거죠. 성삼에 참 많이 고마워 했죠.
베르노: 그리고 그때 우리가 묵주기도며 성전 건립을 위한 기도를 많이 했잖아요. 그 기도의 힘이 커지고 해서 성삼성당의 도움이란든가 모든 도움이 기도의 힘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프란치스코: 구입과정에서 교구에서 융자를 해주지 못하니 계속 리즈하는 것을 권했는데 계약상 만약 구입을 못하면 또 다른 곳으로 찿아 나가야 했고 Deposit한 돈과 수리비용도 포기를 해야하는 상황이라 상업용 융자라도 받아서 구입하는 방안이 유일한 방법이었죠. 건물 구입에 관하여 교구의 사전 허가를 받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내려야 했던 이 결정이 참으로 정 신부님한테 가장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생각되요. 성전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로 신부님 마음 고생이 엄청 심했었어요.
요셉: 저는 항상 정 신부님이 아니셨다면 성전 구입이 불가능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건축기금의 많은 부분을 신부님이 직접 기부받으시고 봉사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기금 마련 방안을 마련하시면서 공동체만을 생각하시면서 이 모든 일들을 결정하시고 추진하셨어요. 여러가지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봤을 때 신부님의 과감한 결단력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진행자: 마태오 성당으로 자리잡고 난 이후에 안정은 빨리 되었겠습니다. 어땠습니까?
요셉: 사실 지난10년을 돌이켜 보면 공동체 정착을 위한 준비기간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어요. 정 신부님이 성전을 마련하시면서 성 마태오 공동체의 기틀을 만들어 주시고 김 신부님이 오시어 신앙적인 성숙을 위해 힘써주시어 우리 공동체가 이제 안정기에 들어서고 있는것 같아요. 정 신부님과 함께 공동체의 일들을 하나씩 이루어 가면서 흘린 지워지지 않는 땀방울의 흔적이 우리 공동체 곳곳에 있는 것을 보고 피부로 느끼지요. 이번 설문조사에서도 나타났지만 소속감을 강하게 느끼시는 분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이런것들이 그동안 쌓인 공동체의 힘이 아닌가 생각해요.
진행자: 성당 구입 과정이나 그동안 잘못 알려진 부분, 잘 몰랐던 부분들이 정확하게 정리된 것 같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지나간 10년을 몸으로 직접 겪은 신 분들 아닙니까. 그렇다면 앞으로 또 다른 10년을 위한 비젼은 어떤 것들이 있어야 된다고 보십니까?
카타리나: 우리가 성삼에서 나올 때도 10년쯤 지났을때 우리가 이만큼 와 있지 않을까 상상했었잖아요. 지금도 우리가 앞으로 10년을 내다 봄에 있어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다면 미래 10년 후에 우리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줄수 있게 청사진으로 만들어 우리 공동체에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Wilkerson주교님께 보여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주교님 은퇴하시기 전에.
베르노: 10년후면 지금 우리 세대가 거의 다 지는 거잖아요. 그러면 1.5세대. 우리 성 마태오 주일학교를 거친 새로운 세대가 언어의 문제없이 한국의 사고방식과 미국의 사고방식 사이에서 조화를 잘 이루어서 잘 이끌어 나갈것이라고 기대하고 지금부터 지원을 많이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셉: 이번 설문조사 하면서도 느낀거지만 청년 그룹이 아주 약해요. 현재는 우리 공동체는 타 한인 공동체보다 연령층이 낮긴하지만 지금부터 청년 그룹을 키워 나가지 못한다 하면 다른 한인 공동체들처럼 노년층이 주가 되는 공동체로 남을수 밖에 없는 상황에 부딪히게 될거예요. 그래서 앞으로 10년을 내다보고 청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개발하여 그들이 공동체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봐요.
진행자: 네 잘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얘기를 정리해 주시죠?
베르노: 10년을 뒤돌아 보면 즐거운 일도 많고, 눈물도 많고 가슴 아픔도 많고 했지만 이 성당이 내 성당이다 라는 마음이 계속 들것 같아서 우리 자녀들에게도 좋은 것을 넘겨 주자라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프란치스코: 마무리 단계 같은데 이렇게 10년을 돌아보면서 이야기 할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부터 반성하면서 더 많이 지원하고 내성당이라는 주인 의식을 신자 한사람 한사람이 갖는다면 더 많이 은총 받고 성장하는 성당이 되지 않을까 생각 해봅니다.
미카엘: 여러분들의 이야기 감명 깊게 들었고 그동안 우리 역사가 이루어 놓은 일들도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앞으로 10년을 위해 할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다가 첫째가 초심의 역동적이였던 우리의 활동을 잊지말고 활력을 불어 넣어 줄수 있는 일들을 많이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 대상은 자녀들이 있는 중장년의 젊은 교우들이겠고요. 또 모임이나 단체 활동, 심신 활동들도 좀더 역동적으로 홍보도 하고 우리 신자들에게 뭔가 더 활동적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요 또 소구역의 모임들이 빈번하고 더 많아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것 같아 앞으로는 초심을 잃지않는 역동적인 활동들을 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크리스티나: 우리 성당으로 새로 오신 분들과 청년팀에게 소외되지않게 공동체에 함께 할수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카타리나: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하려면 말씀으로 사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말씀을 배우고 읽고 실천하는 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요.
진행자: 지나온 10년을 오늘 장시간 이야기를 나눠 봤는데요 사실 시련기일수록 우리 공동체가 더 단단해졌다는 데는 모두가 공감할 겁니다. 앞으로 마태오는 도약의 시기만 남았다라는 생각도 듭니다. 앞으로 10년 후에도 오늘처럼 또 이야기 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더 좋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장시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