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새해 첫날인 오늘,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복을 빌어줍니다. 행복 하십시오. 건강 하십시오. 올해는 계획하는 일 모두 이루십시오. 이스라엘의 사제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의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빌어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인사말을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 그렇습니다. 오늘은 서로가 서로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를 빌어 주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 은총과 평화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에페소서 2장 14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며, 그 분은 당신의 피로써 평화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의 문을 여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평화, 샬롬이라고 인사하셨습니다. 히브리어 샬롬에는 완전, 완성의 개념이 들어가 있습니다. 샬롬은 완전한 번영과 충만한 평화를 말합니다. 모든 면에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도 충만하게 채워진 행복이 바로 샬롬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주는 평화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다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온전한 의미에서 샬롬이자 완전한 평화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평화를 빌어주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평화를 받는 사람들은, 또한 그리스도처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 9)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셨 던 것처럼, 언제나 용서하고, 원수라 할지라도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새해를 맞이하면서, 다시금 우리 모두가, 주님 사랑의 도구, 평화의 사도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면 좋겠습니다. 먼저 사랑하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선행을 베풀고, 먼저 인사하고, 먼저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코로나로 힘든 한 해를 보냈습니다. 또한 우리 앞에 어떤 고난이 또 닥치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때입니다. 백신의 성공으로 인해 코로나라는 전염병, 그 무서운 질병을 극복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사회 경제적인 후유증은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어려울 때에는 서로가 서로를 보살펴야만 합니다. 어려울수록 더 도와야 하고, 힘들수록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서로를 더 많이 돕는 해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님을 찾아 냅니다. 그리고 천사에게서 들은 말을 전하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합니다. 마리아는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또 곰곰히 되새기십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천사의 환호처럼,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요셉, 마리아, 목동들에게 고요한 기쁨과 잔잔한 평화를 선사 해 주었습니다. 남김없이 자신의 전부를 요셉과 마리아에게 내 맡기셨던 아기 예수님, 전적으로 여러분과 나, 인간을 신뢰하시는 하느님, 아낌없이 여러분과 나,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바로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인생은 사랑하며 살자고 결심하면 문득 더 짧게 느껴집니다. 짧은 인생, 알뜰 살뜰히 사랑하며 삽시다. 그렇게 충만하게 살아갑시다. 올해는 여러분에게도 저에게도 최고의 한해, 가장 빛나는 한해가 될 수 있도록 이 미사 중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 드립시다. 우리 공동체를 성모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열심히 기도드립시다. 오랫동안 미사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도 오늘 열심히 기도드립시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빕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오늘 구세주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하느님께서는 어둠 속을 걷던 백성,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으로 오셨습니다.” (1 독서) 코로나 사태로 암울했던 한 해를 보낸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사랑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성자께서 주시는 위로와 희망 그리고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시길 빕니다.
어제 성탄 대축일 밤 미사 공지사항에서 말씀드렸던 내용을 오늘 한 번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요지는 우리 마태오 성당 봉사자들의 품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른 성당이 흉내 내거나 따라올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유를 봅시다. 벌써 소문을 듣고 한국에서도 연락이 옵니다. “마태오 성당 구유가 이쁘네요.” 어디 구유만 이쁩니까? 구유로 이어지는 장미 꽃길이 그렇고, 여기 패티오의 장미 넝쿨과 조명,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가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이 아름다움은 다른 성당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제 한 이야기를 오늘 또 말씀드리는 이유는 어제 못 오신 분들이 많으셨고, 무엇보다 지금 이 미사는 방송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시청하시는 분들 중에는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다른 성당에 다니는 교우분들이 있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대놓고 자랑질하고 싶은거죠.
우리 봉사자들의 정성이 남다릅니다. 현재 나홀로 성가대의 유일한 성가대원인 지휘자님은 성가 단원들의 노래를 일일이 개별적으로 녹음한 다음, 역시 우리 성당 전문가들의 손을 거쳐 마치 생생하게 합창을 부르는 것 처럼 성탄 대축일 성가를 들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 말고 또 어느 성당이 그렇게 하고 있을까요? 우리 교우분들이 혹시라도 추우실까봐 케노피를 교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기 집의 히터를 기증하신 분도 있고, 구입하라고 기부 하신 분도 있어서, 보시다시피 9개의 히터를 언제든지 가동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사들 같이 정성으로 임하는 복사들이나, 미사 전이면 낙엽 하나 보이지 않게 언제나 말끔히 치우는 분들이 한결같이 고마운 우리 교우들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도 없고, 만족해서도 안 됩니다. 에수님께서는 춥고 냄새나고 더러운 마구간으로 오셨고, 우리가 만나야 할 형제들이 춥고 냄새나고 더러운 길거리에서 날마다 죽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우리 교우로부터 전해 받은 동영상(출처미상)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껏 어디에 있었는가? 잠잠히 기도할 줄도 묵묵히 가난한 이 찾을 줄도 모른 채, 그저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 받을” (요한5, 44)뿐이었으면서, 예수님 마음에는 관심도 없었으면서, 그저 위로받기만을 가지 만족만을 좇아왔을 뿐이면서, 그게 신앙인 줄 착각하고 있진 않았나? 나는 무엇을 위해서 성체를 모셔왔나?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주님을 찾고 있나,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주님에게서 멀어져 있나? 그리고 이 동영상의 마지막 구절이 화살처럼 제 가슴에 꽂혔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의 속에서도 형제애를 배우지 못한다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런 시련을 겪으면서도 형제애를 배우지 못하고 또 실천하지 못한다면, 우리 인생에서 과연 뭐가 남을 수 있겠습니까? 코로나로 인해 내 건강이 중요하고, 우리 가족의 안위가 그 무엇보다도 더 절실해져서일까요? 눈에 보이는 이웃에게도, 우리의 전부이신 하느님에게도 오히려 전보다 더 소홀해지지는 않으셨는지요? 어려울 때일수록 더 기도하고, 그럴수록 서로가 힘을 합쳐 더 도와야 하는 줄을 모르는 사람이 우리 중에는 한 명도 없을 텐데 말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너무 가난하여 선물도 준비하지 못한 채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간 목동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다른 목동들이 앞다투어 선물을 바칠 때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에 멀찍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을 그 목동을 성모님께서는 당신 가까이 오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빈손이던 그 목동의 양팔에 구세주를 안겨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그보다 더 위대한 선물이 또 어디 있을까요? 끝없이 펼쳐진 바다라 할지라도 다 담을 수 없는 분, 우주보다도 크시고 은하수보다도 아름다우신 분을 별안간 받아 안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한 것이라고는 미천하기 그지없는 우리들입니다. 자격도 공로도 없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전부를 내어 주셨습니다.
성탄의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누구라 할지라도 조건 없이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 그런데 그 사랑은 목동이 그랬던 것처럼, 도저히 혼자만 안고서 볼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고, 안겨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어렴풋이 나마 이해 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이 되시어 우리 곁에 오신 하느님 사랑의 깊이는 우리가 그분 육화의 겸손과 그분 십자가의 사랑에 동참하게 될 때, 오직 그때에만 비로소 어렴풋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칸 사상의 학문적 전통)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한 1, 19) 그렇게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티토 2, 11) 하느님의 오묘한 신비, 그 사랑의 높이와 깊이, 너비와 길이로 그 빛은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그 얼마나 무궁하시며, 그 사랑의 풍요로움이 그 얼마나 무한하신지요!
그 사랑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감탄하고 찬양 드립시다. 다시금 예수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우리 구원자, 우리 동료, 우리 형님, 우리 주님,”(성 프란치스코) 우리 하느님께서 오늘 탄생하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오늘 밤 구세주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하느님께서는 어둠 속을 걷던 백성,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으로 오셨습니다.” (1 독서) 어느때 보다도 암울했던 한 해를 보낸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사랑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성자께서 주시는 위로와 희망 그리고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시길 빕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처음으로 구유를 만들 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아기가 겪은 그 불편함을 보고 싶고, 또한 아기가 구유에 어떻게 누워 있었는지, 짚북데기 위에서 그리고 소와 당나귀 옆에서 어떤 모양으로 누워 있었는지를 내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1 첼라노 30, 84) 평상시라면 여느 때처럼, 아늑하고 고급스러운 실내조명 아래 평화로이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뵈었겠지만, 오늘 우리는 찬 공기를 견디며 구유가 마련된 바깥 장소로 경배를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이긴 하지만 성가정이 겪으셨을 고초를 조금은 떠올려 볼 수가 있었습니다. 춥고 냄새나고 더러운 곳!
마구간, 그곳은 인간의 욕심을 위해 노예처럼 부리는 가축을 가두어 두던 곳이 아니겠습니까? 그곳은 사람이 온전히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동물처럼 학대받고 버려지는 곳! 그곳은, 예수님께서 태어난 곳이며, 우리가 찾아가야 할 형제가 있는 곳이며, 누구라도 주님을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장소입니다. 왜냐하면, 헐벗은 자,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병들거나 감옥에 갇힌 자,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당에도 한 번 오신 적이 있어서 여러분도 기억하실 텐데, 이 소피아 수녀님으로부터 엊그제 전화가 왔습니다. 수녀님은 코로나가 생기면서부터 줄곧 손수 마스크를 만들어 주변에 나누어 주고 있는데, 그 일로 인해 올 한 해 얼마나 바빴는지, 그리고 음식을 만들어 노숙자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지속해서 해 오고 있는데, 이 일이 얼마나 기쁜지를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에도 도움을 청해 오셨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듯이, 코로나로 인해 도움이 필요한 곳이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와 우리 가족의 건강과 안위가 너무 절실해져서 일까요? 이웃에게도 그렇고 하느님께도 그렇고 혹여 그전보다도 더 소홀해지지는 않았는지요? 어려운 때일수록,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도와야 하는 줄을 모르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교황님께서 작년 성탄절 밤 미사 강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달려간 목동들은 예수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해 갔지만, 그중에서 한 사람은 너무 가난해서 선물을 준비해 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다른 목동들은 모두 다 앞다투어 선물을 바치고 있는데, 빈손이던 이 목동은 멀리 떨어져서 난처해하며 서 있었습니다. 그때 빈손으로 온 목동을 보시고 성모님께서는 가까이 오라고 청하셨고, 아기 예수님을 그의 팔에 안겨 주셨습니다. 이때 목동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느낍니다. 자신은 아무런 자격도 없는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선물을 두 팔에 안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선물 중의 선물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계속 안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황님께서 해 주신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천사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그날 밤 목동에게 전합니다. 목동은 한편으로는 소외되고 낮은 계층을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목동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 주위로부터 무시당하며 살았던 사람들, 냄새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정결례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믿을 수 없는 사람들로 낙인이 찍혀서 재판정에서 증인으로도 설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목동들은 다른 한편으로 단순히 평범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처럼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온갖 약점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지극히 사랑해 주십니다. 빈손으로 경배 왔던 그 가난한 목동처럼 우리 또한 주님 가까이에 다가설 자격이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선물로 내어 주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이고, 2 독서 말씀대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 입니다.”(티토 2, 11)
바오로 사도는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성탄은 선물로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웃에게 기꺼이 선물이 되어 주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고, 하느님과 이웃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날입니다. 두 팔로 예수님을 받아 안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 마음속에선 두려움과 “걱정이 사라지고, 기쁨이 태어나고, 축제가 시작됩니다.” (베네딕토 교황님 성탄 강론)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 천사는 이것이 우리를 위한 표징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순진하고 귀여운 아기의 모습만 떠올린다면 우리는 참된 표징을 놓치고 맙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유하시지만 나약하고 무능한 인간 아기의 모습으로, 지극히 가난하고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거기에는 단 한 가지의 이유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입니다. 오늘 밤, 우리의 구원자 하느님을 우러러 감탄하고, 기뻐하며 찬양합시다. 코로나로 고통받는 우리를 보살펴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우리 또한 그분의 손과 발이 되어 줄 수 있는 은총을 이 거룩한 밤에 청합시다.
오늘 우리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축일은 교황 비오 11세의 1925년 교서, Quas Primas(첫째의 것)을 통해 제정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당시 유럽에서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전체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안팎에서는, 세속주의의 영향으로, 교회 권력을 비롯하여, 그리스도의 권위에도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집권하였고, 독일에서는 인종주의를 표방하며 나치당이 결성되었습니다. 이들 독재 권력은 교회의 권위에 커다란 위협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왕 대 축일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존경이 현격히 줄어들던 무렵, 그 어느때보다 필요성이 절실했던 시기에, 제정되었던 것입니다.
비오 교황님께서는 이 교서를 통해 모든 국가 및 정치 지도자들은 마땅히 그리스도께 존경을 드려야 한다고 천명하셨습니다. (Quas Primas 32) 그리고 모든 신자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 정신과 의지를 다스리고 계시는 분이 그리스도 이심을 잊지 말고, 이 대축일을 통해 힘과 용기를 내라고 격려 하셨습니다.(Quas Primas, 33.)
그리스도와 교회의 권위에 대한 불신은 오늘날에 와서 더욱 커졌습니다. 그 이유에는 극도의 개인주의가 있습니다. 자신이 따라야 할 권위는 오직 자기 자신 밖에 없는 것 처럼 살아갑니다. 합법적이고 정당한 권위 마저도 배척하고, 그저 내가 싫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제 방식으로만 행동합니다. 통치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왕이라는 호칭 자체에서도 거부감을 가집니다. 전제군주를 연상시키는 구시대적 잔재, 시대착오적인 칭호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될 것이,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왕권의 본질은 다름아닌 사랑과 겸손, 그리고 봉사라는 점입니다.
높은 자리를 탐내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민족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2-45) 그래서 오늘 우리가 기리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막강한 세력으로 압도하는 왕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으시는 사랑의 임금님,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주님, 섬김 받지 않으시고 도리어 섬기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데려오고,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고, 반대로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시면서(1독서) 당신의 양떼를 지켜주시고, 보살펴 주십니다. 하느님의 통치는 보살핌이고, 하느님의 다스림은 봉사요, 희생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왕의 직분, 이웃을 섬기는 일에 우리 모두를 초대해 주십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낮추시는 임금님, 그 신비롭고 겸손한 모습은 베들레헴 마구간에서도,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위에서도, 성체 안에서도 한결 같습니다. 그뿐 아니라,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 들 과도 오묘한 일치를 이루십니다.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 같은 일치는 불의한 이에게도, 의인의 눈에도 감추어 져 있어서, 심판 날에는 이들 모두가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헐벗고 굶주린 채 추운 거리에서 죽어가는 이들이 헤아릴 수 업이 많습니다.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보고만 계시는지, 왜 아무것도 안하고 계시는지 원망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무것도 안 하신 것이 아닙니다. 뭔가를 해오셨고,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그들을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만드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오늘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우리가 할 수 있다면, 꼭 해야만 할 것입니다.
사랑으로 비우시고, 사랑으로 낮추시고, 사랑으로 돌보시는 만민의 왕, 우리 임금님을 흠숭하며 오늘도 그 분을 닮아 나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우리 또한 더 낮아지고 더 비워내서 그리스도의 형제, 작은 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그분의 십가가곁에서, 고난받는 이웃곁에서 주님과 형제를 같이 섬기기로 약속합시다.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다가, 지금은 하느님 곁에서 천상 영광을 누리고 있는 모든 분들을 가리켜 교회는 성인이라고 칭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교회의 모든 성인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전례력에 축일이 없는 성인들, 다시 말해 시성된 적도 없고, 그래서 잘 알려지지도 않은, 무명의 성인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크신 은총을 베푸시어, 당신의 거룩함에 참여케 해 주시고, 믿음의 보상으로 천상 영광을 허락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성인들의 삶을 기리며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는 두가지 방식으로 성인을 공경하는 데, 하나는 성인들의 삶을 본받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인들의 전구를 구하는 일입니다.
거룩한 삶에로의 초대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부르심입니다. 이는 어느 몇몇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사랑안에 살수 있도록,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 안에서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부르십니다. 성인들 중에는 각계각층의 사람들, 부자도 있고, 가난한 이도 있었으며, 성직자와 수도자, 농부와 귀족도 있었으며, 학자도 있었고, 문맹인도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기 모인 우리 모두도 하늘의 성인들이 그랬던 것 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 성사를 통해 성령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할 이유가 우리 중에는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인들에 대해서 간혹 그릇된 인식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성인들은 죄도 짓지 않고, 모든 덕을 두루 갖춘 사람, 그래서 그들은 항상 겸손하고 인내 로우며, 자기 자신 보다는 언제든 하느님과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인들은 날 때부터 이미 성인으로 정해져서 난 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성인으로 되어진 사람들입니다. 성인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회개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바꾼 사람들이 성인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하루 아침에 손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오랜 시간과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인들의 삶 속에서 배우게 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분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말씀은 똑 같은 생명력으로 우리 또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우리는, 자신의 삶을 한번 더 진지하게 돌이켜 보게 되고, 남은 인생의 목표를 재조정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이제부터는 더욱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고자 새롭게 결심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회개는 성인들에게 있어서도, 우리에게 있어서도, 거룩한 삶을 위해 결코 없어서는 안될 주춧돌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회개는 하느님의 초대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 응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인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어떤 위대한 업적을 남겨야만 할까요? 물론 그런 성인들도 있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이 성인이라기 보다는, 그 성인을 통해, 그 성인 안에서, 오히려 하느님께서 위대한 일을 하셨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거룩함은 사람이 만들어 내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거룩함은 홀로 거룩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착한 사람, 나쁜 사람, 현명한 사람, 미련한 사람, 좋은 사람, 미운 사람 할 것 없이, 온갖 다양한 사람들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어느 시대이든, 어떤 상황이든, 이 세상안에서 당신의 일을 계속 이어가고 계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활동은 어느 한 시대나 어느 한 장소에만 국한되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지금도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여기서도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일, 하느님의 거룩하신 사랑, 그 놀라운 은총으로 인해 우리 또한 성인들이 지녔던 기쁨을 가질 수 있고, 성인들이 누렸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설령, 위대한 일은 아닐지라도, 그저 평범한 일상 속에서, 혹은 미래가 불안하거나, 계속되는 고난의 연속 속에서도, 묵묵히 인내하며 조용히 봉사하는 사람들이 우리 바로 곁에 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을 자신의 숨은 행동으로 밝히 드러내 주는 익명의 성인 성녀들입니다.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 지금의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의 약속된 미래에 희망을 둘 줄 아는 사람,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인해 깨끗 해져서 마침내 하느님을 볼 수 있을 그 기쁨을 가슴 속에 미리 품고 살아가는, 그렇게 마음이 가난한 성인, 그렇게 평화로운 숨은 성녀로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