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 백신 접종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캘리포니아주의 감염 위험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불과 서너 달 전만 해도 신규 감염자가 매일 만 명, 그리고 사망자 수도 500명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감염자의 경우 하루 이삼 천명 정도, 사망자의 수도 70명 정도로 줄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의 경우에는 매일 확진자 수가 수천 명이던 것이 이제는 3-4백 명 정도로 확 줄었습니다. 시민들이 대체로 방영 지침을 잘 지키고 있고, 또 백신의 효과가 뛰어나서, 이렇게 좋은 결과를 내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 성당도 활기를 되찾고 있습니다. 고해성사를 보는 신자수가 늘어나고 있고, 미사에 참례하시는 분도 많아졌습니다. 정녕코 성체성사는 우리 신앙생활의 원천이자 정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안에 머무른다고 하셨습니다. 영성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 안에 머무르고, 그분과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성체를 영할 때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자라나게 되고, 예수님을 본받는 제자로 변화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날마다 영하는 영성체는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을 보존하게 해주고, 또다시 죄에 빠져서 이 은총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보호해 줍니다.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오랫동안 미사와 영성체를 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으로 쇠약해진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동안 못 보던 구역원들도 만나고 싶고, 성당 활동도 빨리 시작하고 싶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먼저는 단연코 미사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바로 이 미사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첫째도 미사이고, 둘째도 미사입니다. 사실 성당에 나오는 궁극적인 이유도 미사입니다. 기도도, 활동도, 봉사도, 친교도, 선교도 그 중심은 언제나 미사이어야 하고, 언제나 성체성사여야만 합니다.
오늘 1 독서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는 확신에 차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소중한 것들을 많이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잃게 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매일 같이 푸른 초원으로 이끌어 주시고, 온갖 위험으로부터 지켜 주시며, 사랑과 희생으로 보살펴 주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양은 멀리서 볼 때는 온순하고 사랑스러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사실 냄새나고 더러운 짐승입니다. 우매하고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길들이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또 늑대나 다른 맹수가 나타나면 힘없이 당하기 때문에 양들에게는 항상 목자가 필요합니다.
우리도 어떤 면에서는 양을 닮았고, 우리 또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서도 우매하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확고한 신념도 주관도 없이,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깐, 그냥 맹목적으로 남들을 따라가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타인종이나 다른 종교 혹은 이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그냥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도 그렇고, 터무니 없는 소문을 곧이곧대로 전하고 믿는 사람을 봐도 그렇습니다. 주변의 사람들, 그 무리에 아무렇 게나 뒤섞여서 생각 없이 휩쓸려 다닙니다. 양들 중에는 무리와 떨어져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는데, 뚜렷한 인생 목표도 없이 그저 한순간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이리저리 방황하며 사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습니다. 사기도 당하고, 약물에 빠지기도 하고, 세상의 온갖 거짓 목자에 현혹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에 오직 한 분 뿐이신 착한 목자만 바라보며 그분의 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도 점점 그분을 닮은 하느님의 자녀, 예수님의 제자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우리 또한 목자가 되어 우리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 할 수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에게로 안내해 주고, 그들이 주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은 작은 목자가 될 수 있도록 이 미사 중에 큰 은총을 구합시다.
부활절 이후로 이전보다는 훨씬 더 많은 교우분이 주일 미사에 참례하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우리 성당뿐만이 아니라 인근 대부분의 성당에서도 똑같다고 합니다. 참으로 반갑고, 기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백신 개발의 성공과 함께 한 명이라도 더 무서운 질병으로부터 지키려고 노력하는 의료진과 정부의 노력에 얼마나 감사한 지 모릅니다.
이처럼 날로 희망이 자라나고 있는 이때, 우리 성당 한 끼 나눔을 통해 이루어지는 많은 일에 대해서도, 너무 감격스럽고 감사할 때가 많습니다. 현재 한 끼 나눔을 후원해 주시는 분들이, 단체를 제외한다면, 202명 이며, 이 중에서 95명은 우리 성당 교우 분입니다. 95명이라는 우리 교우 후원자들의 숫자를 생각해도 작은 숫자가 아니며, 마태오 성당 교우가 아닌 후원자를 생각해도 작지 않은 숫자입니다. 5만 불 가까이 모여진 후원금도 적지 않고, 35명 정도의 봉사자 숫자도 작지가 않습니다.
이 중에는 물론 고액 후원자도 많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자선금의 액수가 아니라, 자비심입니다. 돈이 너무 없어서, 비록 마음은 있다 할지라도, 자선금 1불을 내지 못하는 사람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자비를 베풀 방법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크게 어렵지도 않습니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만큼, 반드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야만 합니다. 결국은, 얼마를 베푸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베푸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키르케고르는 이런 예를 든 적이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노새가 있어서 강도를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태워 갔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마리아인은 가난한 사람이었다고 합시다. 상처에 부어줄 기름도 포도주도 없었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등에 업어서 여관까지 갔습니다. 주머니에 동전 한 닢 없어서 여관 주인에게 부탁해 보지만 결국은 쫓겨나고 맙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 상처투성이의 강도 맞은 사람을 따뜻이 위로해 주는 것밖에 없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다른 사마리아인이 성경의 노새와 돈이 있었던 그 사마리아 사람보다 덜 선하다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요!
액수의 크기보다 어떻게 자비를 행하였냐가 더 중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오래 성당에 다녔고, 얼마나 많이 알고,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이 기도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오늘 전례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의 모습이 얼마나 생동적이고 역동적입니까? 그들 역시 처음에는 부활하신 분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서도 잘 믿지를 못했습니다.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알았고, 눈으로 그분의 상처를 살펴보고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만 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주님께서 돌아가신 후 주님을 찾지도 않던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이나 사랑해 주셨건만, 그들에게 주님은 죽은 사람이고 묻힌 사람일 뿐, 그 누구도 찾아갈 생각도 않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찾아간 사람은 다름 아닌 예수님입니다. 그들 가운데로 가시고, 마음을 열어 주시고, 성경을 설명해 주시고, 사랑과 용서의 힘을 불어넣어 주시고, 평화와 기쁨을 심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찾아가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애타게 찾을 때, 우리가 필요로 할 때,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때, 그게 우리 인생에 있어서 아주 빛나는 때거나 혹은 어두운 때거나, 뜻밖에 나타나시고, 완전히 새롭게 당신을 보여 주십니다. 그 사랑에 감복한 제자들을 한번 보십시오. 1 독서 베드로 사도의 힘찬 설교는 벌써부터 그리스도를 닮았습니다.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모습이 확신과 용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에게 약속된 영원한 생명,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새롭게 부활할 희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요? 기쁨이 넘치는 지요? 평화가 강물처럼 넘치는지요? 사랑이 샘 솟는지요?
오늘 2 독서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는 길은 우리가 계명을 지킬 때라고 합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게 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만방에 전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살도 없고 뼈도 없는 유령과 같은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서 묻힌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말만 앞세우고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유령과 같은 믿음입니다. 2 독서 말씀처럼 주님을 안다고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주님의 상처를 우리 마음 속깊이 간직하고, 그 사랑에 눈뜨고, 가식이 아니라, 위선이 아니라, 거짓이 아니라, 진실로 사랑하고, 진실로 믿고, 진실로 변화 되어, 이제는 그리고 정말 이제부터는 마침내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청합시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주간 첫날 저녁,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 주일 저녁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오늘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서로 축하하기 위해 여기 모인 여러분에게도, 그리고 방송을 시청하고 있는 교우 여러분 모두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흘러 넘쳐나길 빕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던 바로 그 첫 번째 날에 토마스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뵈었다고 말하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드레 후, 다시 말해, 부활 후 다음 주일에는 주님을 직접 뵐 수 있었고, 마침내“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감동적인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날이 두 번 모두 주일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언제나 또 어느 곳에서나 활동하고 계시지만, 매 주일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 공동체야말로 주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평화와 너희와 함께, 제자들 에게 하셨듯이, 그렇게 우리에게 평화의 인사를 건네주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축복해 주시고, 우리 각자에게 하느님의 능력, 특별히 용서의 능력과 사랑의 능력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매 주일마다 모든 이가 예수님의 현존을 똑같이 느끼거나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미사 시간이 마냥 지겹기만 할 때도 있고, 그저 형식적으로 성당에 가야만 한다는 것이 답답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도 어느 날 문득 하느님의 현존, 그분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할 때가 있고, 그런 때에는 토마스 사도가 그랬듯이 우리 또한 그분께 진정으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기도 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보고야 만 믿겠다던 마치도 토마스 사도와 같은 태도를 반성하고 이제부터는 의심하지 않고 믿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합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란 여기 모인 우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증언을 믿고,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우리 스스로 선택했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 말씀 그대로 복된 사람입니다. 주일이란 바로 이 복된 주님의 제자들이 모여 주님께 우리의 신앙과 당신께 대한 사랑을 함께 고백하는 날입니다.
왜 성당에 가야 하는 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는 데, 우리가 왜 성당에 옵니까? 대영광송에 모두 잘 나와 있습니다. 주님을 기리나이다. 찬미하나이다. 주님을 흠숭하나이다. 찬양하나이다. 주님 영광 크시오니 감사하나이다. 찬미와 흠숭,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비를 빌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스어로 키리애 엘레이손,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틴어로 아뉴스 데이, 미세레레 노비스, 하느님의 어린양,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성경에서 자비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 번째는 용서를 베푸는 것이고, 두 번째는 도움을 베푸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죄 많은 우리 죄인을 용서해 주셨고,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는 한없는 연민의 정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감사를 드리고 우리 또한 자비로운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날이 오늘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수모를 겪으시며 억울하게 처형되는 그 순간까지도 당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 기도 하시는 예수님, 가여운 마음이 드시어 당신의 손으로 친히 환자를 어루 만지며 치유하시는 주님을 본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주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생각하며 남을 용서하고, 이웃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고 오신 주님을, 오늘은 더 반갑고 기쁜 마음으로 맞이합시다. 성체를 영할 때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혹은 나만의 방식으로 주님께 사랑을 고백해 봅시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시듯 우리 또한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래서 내 마음 속에도 이웃 과의 관계에서도 평화가 더 자라날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교우 여러분의 가정에 풍성한 은총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교회 축제일 중에서도 가장 큰 축일입니다. 그리고 올해는 작년과 달리 교우분들과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안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부터 스스로 일어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의 신비를 말한다면 이는 곧 하느님의 신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만 지니고 계신 절대적인 자유, 그 자유로운 하느님의 오묘한 신비, 하느님의 조건 없는 은총의 신비, 하느님의 무한하신 동정심의 신비! 이처럼 부활에 있어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며,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 은총의 신비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자신의 부활을 보장해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이 말씀 그대로,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사도들의 복음 선포가 시작되었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신앙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로 죽은 예수님이 참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 또한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 3, 20-21)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비천한 몸이 예수님처럼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자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광스러운 미래가 마침내 열리게 된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서, 또한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들은 바오로 사도의 권고대로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위에 있는 것이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동정심, 친절, 겸손, 온유, 인내 등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입니다.
오늘은 우리 모두를 위한 기쁜 날입니다. 우리가 세례 성사를 통해, 마침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삶,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영원한 삶을 받았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탄생한 우리 생일이기도 합니다. 이 생일날 우리는 세례 때의 다짐을 새로이 하면서 세례 성사를 갱신하게 됩니다.
오늘은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네명의 새로운 형제자매들이 세례 성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온전히 새로 태어난 형제자매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기쁨으로 환영합시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활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미래의 것이고, 부활은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생명에 관한 것이며, 부활은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관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바로 오늘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거룩하고 기쁜 오늘,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이 미사를 통해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시다. 예수님을 다시 일으켜 주시고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성체성사로 우리 안에 오시는 예수님, 언제나 살아 계신 예수님과 기쁨 속에서 온전한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정성껏 미사를 드립시다.
예수님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해마다 파스카 축제 기간에만 자그마치 25,000마리 정도의 어린양이 바쳐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사제의 손으로 제단에 바쳐질 어린양의 경우에는 성전에 이르기까지 별도의 행렬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참된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에 들어가실 때도 군중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행렬을 지으며 이렇게 외칩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느님, 이스라엘의 왕을 구해 주소서. 오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소서. 호산나!
한편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셨을 때 도성을 보며 우셨고, 이튿날에는 잎만 무성했지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를 보고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성전에서는 환전상과 물건 파는 사람들을 내 쫓아내며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자주 쓰는 말 중에는, “하늘은 회개하는 죄인을 보고는 기뻐하지만, 회개하지 않는 사람, 마음이 굳은 사람을 보고는 눈물을 흘린다”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성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우리 각자가 올바른 준비를 하고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혹여 우리 마음속에 부정하거나 인색하거나 정의롭지 못한 마음은 없는지, 신앙의 열매인 겸손, 사랑, 순종, 용서와 희생의 열매를 맺어 오고 있는지, 그리고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따뜻이 맞아들이고 있는지를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방금 들은 예수님의 수난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유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 간악한 음모와 거짓으로 예수님을 고발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죄 없는 사람을 처형하는 빌라도의 비겁한 모습을 봅니다. 군중들은 살인자 바라빠를 풀어주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 댑니다. 침을 뱉고 때리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잔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바로 우리 세상의 모습이고 우리 현실의 모습입니다. 나만 괜찮으면 그만이고 남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은 바로 그 잔혹한 세상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주님의 종 넷째 노래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로 인해 십자가를 지셨고, 당신의 상처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주간 동안 우리는 우리 구원을 위해 수난하고 죽으신 에수님을 묵상하며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2 독서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죽음보다도 더 큰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성주간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를 묵상하며 우리도 주님의 놀라운 사랑, 주님의 커다란 희생을 본받을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이곳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 자택 대피령이 내려졌던 날이 작년 3월 19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꼬박 1년이 지났습니다. 미국 전체를 본다면, 3천만 명이 넘게 코로나 19에 감염되었고, 55만 명이 넘게 사망하였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신자들은 미사 참례도 못 했습니다. 작년 사순절로 기억합니다. 로마의 여러 성당을 도보로 순례하시던 교황님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텅 빈 거리를 걷는 교황님의 뒷모습이 마치도 예수님 혼자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듯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셨습니까? 우리는 모두 안전하게 문을 잠가 걸고 있으면서, 예수님만 홀로 골고타 언덕으로, 보내 드릴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팬데믹으로 막대한 피해를 겪었던 지난 1년을 돌이켜 보면, 요즘은 그래도 다분히 희망적입니다. 백신이 나왔고, 우리는 고해성사를 보고, 세례식을 거행하고, 부활절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19가 누군가에는 가족의 목숨을 빼앗아 간 철천지원수이지만, 누군가에는 오히려 더 느긋하고 편안한 시간을 제공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부지불식간에, 생각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느덧 하느님과도 점점 멀어지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최소한 두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Harrison Ayre and Michael Heinlein, Finding Christ in the Crisis, pp. 62-67 참조)
첫 번째는 나태입니다. 나태는 칠죄종의 하나입니다. 이 말은 곧, 나태가 그 자체로도 죄가 되지만, 동시에 다른 죄의 뿌리도 된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acedia 라고 하는데, 게으름이라는 뜻이지만, 원래는 ‘선을 행하려는 열망을 멈춘 것’ 이었다고 합니다. 남에 대한 배려가 없고,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태만하고, 선행에 대해서는 무감각, 무관심한 것이 acedia입니다. 자택 근무하면서 시간이 많아졌지만, 몸이 편해지면서 오히려 더 게을러져서, 봉사와 기도를 등한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마음은 빠르게 식어만 갑니다.
하느님과 멀어지는 두 번째 원인은 영적 나르시시즘입니다. 나르시시즘은 지나치게 자기 자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거나, 지나치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 왕자병, 공주병 걸린 사람들의 자기중심적 성격이나 자기중심적 행동을 말합니다. 영적 나르시시즘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성 생활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심이 많지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거나, 아예 잊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시간이 많아지면서 유튜브 미사와 강의는 부지런히 찾아서 듣고, 기도도 누구보다 열심히 하지만,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우리 자신보다도 먼저 이웃을 보살피라고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마저 내어 놓는 밀알이 되셨습니다. 이렇듯 자신을 바치는 사랑이야 말로 모든 덕 중에서도 최고의 덕입니다. (가톨릭 교리서 1826). 바오로 사도께서도 믿음과 희망, 사랑, 이 세가지는 계속되지만, 그 중에서도 으뜸은 단연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간직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여기에 대해 교황님께서는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덜 생각하고, 이웃들, 특별히 고통받는 가난한 이웃들에 대해서는 더 많이 관심을 두고 보살피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스 사람 몇 명이 예수님을 만나 뵙고자 필립보에게 먼저 청하고, 필립보와 안드레아는 이 사실을 예수님께 알려 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를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이 그리스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한 사실들,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시고,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 그리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군중이 환호했던 일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리고 예수님에게 일어날 더 큰 영광, 더 빛나는 일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기대하고 원하는 세속적인 영광이 아니라, 지극히 거룩한 십자가의 영광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를 통한 사랑의 승리! 십자가를 통해, 성부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통해, 성자께서 영광을 입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높은 권좌로 올라가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조롱을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들어 올려졌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느님의 오른편으로 들어 높여집니다. 주님의 영광의 시간, 그 영광은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와 주님의 영광은 따로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성부의 무한하신 사랑은 십자가에 달리신 성자를 감싸 안으셨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 사랑의 본질을 보여주셨습니다.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시어, 영원하신 분께서 사랑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로 우리 모두를 이끌어 들이셨고, 당신 피로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하게 해 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손과 두 발이 묶인 채, 꼼짝달싹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어느때보다도 무기력하셨지만, 바로 그 시간에, 가장 위대한 은총,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시고 베푸셨습니다. 우리 또한 코로나로 무기력해진 이 상황을 우리의 십자가로 받아 안고, 또 예수님의 십자가와 일치시킬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더 큰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시고, 세상에 필요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팬데믹 가운데서도 묵묵히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수많은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그 행렬 가운데로 우리도 함께 들어갑시다. 주님 홀로 쓸쓸히 골고타로 올라가시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나누어 받아 안고, 우리 또한 우리의 작은 십자가로, 주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는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 사순절 한 가운데서 맞이하는 기쁨의 주일, 오늘은 장미 주일로도 불리는 Laetare Sunday, 즐거워 하여라 주일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도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제가 전하고자 하는 강론 말씀도 기뻐할 만한 내용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먼저, 성 요셉의 해에 대한 내용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올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제정하신 성 요셉의 해 입니다. 작년 2020년 12월 8일, 원죄 없으신 성모님 축일에 시작하여, 올해 12월 8일에 끝나게 됩니다. 성 요셉은 성모님 다음으로 사랑받는 성인이시고, 전교회의 주보성인이십니다. 노동자들의 수호자이시고 구세주의 보호자이시며 임종하는 이들의 수호자이십니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의 주보 성인이시기도 합니다.
교황님의 성요셉 사랑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교황이 되신 지 불과 두 달도 안되어서 2013년 5월 1월, 미사 성찬기도문에서,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바로 뒤에, 그 배필이신 성 요셉을 추가 할 수 있도록 승인해 주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에서 잘 드러나지 않은 채, 평범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고에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팬데믹 상황에서 수고 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그렇고 환경 미화원과 간병인, 그리고 운수업의 노동자들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 분들과 밀접하게 엮여져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성요셉이야 말로 하느님 아버지의 지상에서의 그림자와 같은 분이라고 말씀하시고, 우리가 성인의 성덕을 따르고, 그분의 전구를 요청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올해 성 요셉의 해에 전대사가 베풀어 지는데, 특히 오는 3월 19일(금요일), 성 요셉 대축일과, 5월 1일 노동자의 성요셉 기념일, 그리고 성가정 축일에, 성요셉께 드리는 기도 등과 같이 합당한 기도를 바치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반드시 통상적인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고해성사, 영성체, 교황님의 지향에 따른 기도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꼭 판공성사도 보고, 우리 모두 전대사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교황님께서 필리핀에 방문하셨을 때, 잠자는 요셉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잠자는 요셉상은 요셉 성인이 옆으로 누워 곤하게 잠이든 모습입니다. 교황님께서는 고민스럽고 식별이 잘 안되는 문제가 있으면 종이에 적어서 성인상 밑에 끼워 두시고는 주무신다고 합니다. 교황님 말씀이 맞습니다. 고민거리로 잠을 못 자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는 거죠. 하느님께 의탁하고, 성인께 전구를 부탁하며, 잠 잘 시간에는 자야만 하는 것이 맞습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쉬고 있을 때, 일을 하고 있지 않을 때, 그 문제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휴식이 끝나고 잠에서 깨어 나면 즉각 그것을 실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 요셉께서는 꿈을 통하여, 4번에 걸쳐 하느님의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서는 즉시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완전한 순명의 모법을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는 잠에서 깨어날 때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의 긴 잠에서 깨어나,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시작 해야만 하겠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그 일을 이제 시작해 나갑시다.
한 끼 나눔에 관련한 소식은 언제나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비가 내리고 오싹 하게 기온이 낮았던 날, 우리 봉사자들이 추위에 떨고 있을 뽀 형제자매들을 위해 정성껏 치킨수프를 끓였습니다. 단순히 지금껏 먹었던 치킨수프 중에 최고가 아니라, 완전히 수준이 한 차원 높았던 고급 수프였습니다. 얼마나 풍부한 맛을 내던지요. 그걸 겹겹이 또 얼마나 정성껏 포장 했으면, 한 시간이 지나도 뜨끈뜨근한 국물 그대로 였습니다. 봉사자들의 환한 모습, 뽀 형제자매들의 마침내 웃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숨길 을 느꼈던 행복한 날 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쁨을 주는 오늘의 복음말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 해서도 아니고, 우리가 만약 이런 이런 일을 한다면, 그제서야 사랑 하실 것이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세상에는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도 분명 있지만, 여전히 증오와 죄악이 만연하고 있는 걸 우리 모두 잘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상을 이루는 일부 입니다.
오늘 요한 복음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 지금 이 못난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셔서, 외아들 마저 내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Laetare 주일, 오늘 하루는 그래서 오직 하느님 사랑만 생각하며 모두가 진짜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은 간데없고, 오늘 예수님의 행동은 분노로 가득 차 있습니다. 채찍을 휘 둘러 짐승들과 상인들을 성전에서 쫓아 내십니다.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화를 내셨을까요?
우선은 당시 성전 상인들의 부패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이 정한대로 성전에서 각종 제사를 드렸었고, 제물로 소나 양과 염소, 비둘기 등을 바쳐야 했습니다. 먼 곳으로부터 동물을 끌고 오는 일이 쉽지 않으므로, 성전에서 바로 구입할 수 있다는 점은 무척 편리하였겠지만, 문제는 가격입니다. 성전 바깥에 비해 많게는 20배나 비싸게 팔았다고 합니다. 성전에는 동물들이 흠이 없는 지 살피는 검사관들이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상인들에게서 뇌물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바깥에서 구입해온 동물에 대해서는 부당하게 불합격 판정을 내리기가 일쑤였다고 합니다. 이러니 순례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값을 치르고도 성전에서 구입 안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성전에 바쳐야 되는 성전 세금의 경우 이방인의 신들이나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은 반드시 성전의 화폐로 교환해야만 하는데, 이 경우 환전 수수료가 1/6 정도로 지나치게 높았다고 합니다. 성전 상인들과 환전상들의 부정과 부패가 이 정도 였으니,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혀서 예수님의 또다른 분노의 이유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성전은 대사제만 들어 갈 수 있는 지성소가 있고, 그 다음으로 사제와 레위인들이 들어 갈 수 있는 곳, 오직 남자 들만이 들어 갈수 있는 곳, 그리고 여자들이 들어 갈 수 있는 곳으로 나눠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방인들의 경우에는 성전 건물 안으로는 들어 갈 수가 없었고, 그나마 성전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이 이방인의 마당이라고 불리던 성전 마당이었습니다. 그 성전 마당이 상인들과 동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으니, 예수님의 분노를 어렴풋이 나마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방이라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하느님을 애타게 찾고 있고, 하느님께 기도 드리고 싶어서, 어렵게 예루살렘까지 왔습니다. 유대인처럼 성전 안에는 못 들어가고, 이방인의 마당이라 이름 붙여진 그 곳이나마, 마침내 발을 들이려고 하는 데, 그곳에 이미 온통 사고 파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면 어떨까요? 이방인들을 위한 공간이건만 장사하는 사람들 때문에 밀려 나게되면 어떤 심정일까요? 바로 그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는 그 장애물들을 채찍으로 쫒아내고 엎어 버리셨을 것입니다.
사순절을 지내며 혹시 우리 공동체 안에는 이런 장해물이 없는 지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비자들이 하느님을 찾아 마침내 우리 공동체에 문을 두드렸을 때, 그들을 환영하며, 친절하게 안내하고, 끝까지 모범을 보여줘야만 하는 데, 혹시 우리 스스로가 모범은 커녕 오히려 그들의 길을 가로막는 장해물이 되고 있지는 않는 지 반성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 정성껏 미사 드리며, 같이 기도하는 모습, 십계명을 충실히 지켜 나가는 모습, 단식과 자선을 실천하는 모습, 서로 위해 주고 서로 돕는 모습,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마음, 거룩한 말, 거룩한 행동이 이어지는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만 하는데, 그걸 알면서도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사교에만 너무 치우치지는 않았는 지를 살피고, 마음을 모아 공동체 차원의 정화와 회개를 위해 함께 노력 해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성전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는 장애 요인이 우리 마음 속에 있다면, 예수님께서 지니신 똑 같은 열정으로 또다시 깨끗하게 정화하려는 의지를 다져야 하겠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고, 예수님의 몸과 피를 영하는 곳이고, 형제, 자매들과 일치하여 사랑을 실천 하는 곳입니다. 공동체도 그렇고 우리 각자의 마음도 그렇고 하느님의 모습을 보다 더 드러 낼 수 있도록 노력 합시다. 우리 또한 시편 저자 처럼 하느님의 법이 하느님의 말씀이 하느님의 사랑이 금보다 순금보다 값지며, 꿀보다 참꿀보다 더욱 달다고 고백 할 수 있도록 지혜와 은총을 구합시다.
“모든 사람이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지만, 자기 자신을 바꾸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톨스토이의 말입니다. 남의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기도 하고, 남의 잘못을 샅샅이 찾아내어 동네방네 헐뜯고 다니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뉘우칠 마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스갯 소리로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오죽했으면 이런 말까지 생겼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변해야 합니다. 남도 아니고, 세상도 아니고, 바로 내가 말입니다.
주일 미사를 안 드리고 있는데도, 어쩐 일인지 아무렇지가 않습니다. 고해성사를 본지도 꽤 오래되었는데, 마음속에선 그다지 불편함이 없습니다. ‘팬데믹이 사라지면 다시 시작해야지,’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막상 그때가 된다고 하더라도, 진짜 그렇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별로 자신도 없고, 의욕도 안 생깁니다. 믿음이 식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원래부터 믿음 자체가 없었던 걸까요? 용서하고 화해하라고 하는데 그런 마음이 안 생기고, 자선하라 하는데, 그럴 마음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고해성사 볼 마음은 안 생깁니다. 혹시 우리 중에도 이런 분이 계신다면, 세례받던 바로 그날을 떠올려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요르단 강,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말씀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해 주시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마음에 와닿지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오직 하느님의 명에 따라 제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러 가는 아브라함을 떠올려 봅시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사악은 자기 생명보다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해 주셨던 앞날의 축복도, 이사악이 살아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이런 것 저런 것 다 떠나서, 어찌 아버지가 아들을 칼로 찌를 수가 있겠습니까? 자식을 던져서도 죽이고, 밟아서도 죽이고, 때려서도 죽이는 부모가 있다지만, 아브라함은 살해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께 제물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확고하였습니다. 하느님께 충실하였고, 그분을 흠숭 하였습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마침내 그 후손 가운데로 예수님이 오셔서, 세세대대 모든 민족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는 것이었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게 내버려 두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자식을 죽여야만 하는 아버지의 고통을 하느님이라고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이사악의 피가 하느님께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당신의 외 아드님,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한 제물로 바쳐질 때에는, 하느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말리셨던 하느님이시지만, 정작 당신의 아드님은 희생제사로 바치시기를 원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 바치는 주일 미사 한 시간, 지폐 한 장의 봉헌도 아까워하는 우리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위해서도, 외 아드님의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그러하기에,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변모는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변모될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닐 수 있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오늘도 그분의 십자가를 지게 된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의 길은 곧 부활의 길이 되고, 우리의 고난은 빛나는 영광으로 바뀌고, 이웃과 나누는 작은 사랑과 희생이 천상 상급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기쁨 말입니다.
세례는 한때 우리 자신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세례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고해 성사는 깨끗이 용서받은 새사람으로 바꾸어 줍니다. 미사 때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하듯이, 성체 성사로 인해 우리 마음과 정신이 바뀌고, 어느덧 우리 손은 주님의 손이 되고, 우리 발은 주님의 발이 됩니다. 우리 눈은 주님이 보는 곳을 향하게 되고, 나도 모르게 골고타 언덕으로 뒤따라 걷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그래야만 합니다.
우리는 세례 성사를 통해 하느님께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오는 부활절 또다시 그 약속을 갱신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다시 약속을 하겠지만, 주님의 더 큰 약속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끝이 될 수 없으며 반드시 부활이 옵니다. 그러나 먼저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되겠지만, 그보다 앞서 형제의 발을 씻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겠지만, 지금 주님과 화해하고, 지금 회개하고, 이제는 남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는 은총을 먼저 구해야 하겠습니다.
엊그제에는 교구 사제들을 위한 온라인 모임이 있었습니다. 호세 대주교님과 보좌 주교님들, 그리고 300여 명의 신부님이 함께했으며, 심리학자인 스테판 케플러 (Fr. Stephan Kappler) 신부님이 강의해 주셨습니다. 주제는 ‘정신 건강을 위한 열쇠로서의 신앙’이었는 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저에게 인상 깊었던 부분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과 자기 자신을 달래는 일에 대한 구별이었습니다.
자기를 달래는 일(self-soothing)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잠깐 잊게 해 주는 것들인데, 와인 마시기, 인터넷 검색, 드라마 시청, 온라인 쇼핑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들은 스트레스를 잠시 잊게는 해 주지만 완전히 없애 주지는 못합니다. 스스로를 볼보는 일(self-care)은 정신 건강과 정서적 행복에 장기적으로 기여하는 행동 또는 습관이라고 합니다. 지금 당장은 다소 힘들거나 불편하게 느껴지더라도, 긴 안목으로 보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금연이나 운동이 그렇고 다이어트고 그렇습니다. 스페판 신부님은 매일의 기도와 감사일기를 예로 들었는데, 여러분들도 기도를 매일 바치고, 감사 일기도 쓰면서 스스로를 돌보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순시기는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제 자리로 돌아오는 시기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이야기에서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난 후, 이내 모든 것을 탕진하였고, 이후에는 남의 돼지를 치면서,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으면서 지냅니다. 그러다 문득 제 정신이 들게 되고, 드디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를 등지고 떠나갔던 작은 아들의 모습은, 어쩌면 오늘날의, 수없이 많은 사람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여기가 냄새나는 돼지우리 인지도 모른 채, 서로서로 오물을 묻히고 튀겨가며, 날마다 속고 속이고, 끝도 없이 빼앗고 빼앗기며 살아갑니다.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 28) 작은 아들처럼 우리도 정신을 차려서 한편으로는 자기 연민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보듬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돌보는 일(self-care), 상처를 도려내고 잘 아물게 치료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아버지에게 돌아와, 아버지와 화해 하고, 아버지 품 안에서, 아버지에게 맡겨 드려야 할 것입니다.
사순절에는 술이나 담배를 끊기도 하고, 간식을 끊기도 하고, 취미나 오락을 줄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며, 우리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지만, 이 자체로도 우리 자신의 훌륭한 고백이고 이웃을 향한 훌륭한 선포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사랑보다 더 클 수가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로마 8, 35)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보다 클 수가 없고, 중요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 사순절은 우리의 죽음을 진지하게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죽지도 않고 썩지도 않습니다. 사순절은 이 완전한 사랑이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빨리 깨닫고, 더는 지체 없이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교회가 부활절을 앞두고 사순절을 지내는 이유는 세례 성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성당에서는 어제 4명의 예비자가 선발예식을 하였고, 모두 부활 성야때 세례를 받게 됩니다. 베드로 1 서의 말씀대로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사순절은 예비자들에게 있어서 깨끗한 양심으로 세례를 준비하는 최종 단계입니다. 교회는 사순시기를 통해 새 영세자를 환영하기 위한 준비를 해 나갑니다. 우리는 과연 예비자들을 주님께 인도할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가? 우리의 말과 행동에 있어서 예비자들의 본보기가 될 만한가?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미사에 참례하고, 어떤 방법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가? 그렇게 사순시기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며, 또다시 회개하고 또다시 하느님께 돌아오는 시기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회개를 통해 준비를 마치게 되면, 우리는 부활 미사 때 우리가 받은 세례를 기쁨과 감격 속에 갱신하게 됩니다.
회개야말로 자기를 위로하고, 자기를 돌보는 으뜸의 방법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다른 때 보다 조금 더 열심히 기도하고, 조금 더 단식하고, 조금은 더 많이 자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선한 지향이 예수님께 견고히 연결되고, 우리의 착한 행실이 어려운 이웃에게 다다를 수 있도록, 크신 은총을 청하며 기도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