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성 마태오 한 끼 나눔은 추수감사절 특별 행사로 진행되었으며, 푸드트럭에서 금방 조리한 아사도 부리토, 스타벅스 커피, 콜라, 털모자, 장갑, 양말 등을 300여 명에게 제공하였습니다. 이런 행사가 가능했던 것은 모두 300여명이 넘는 후원자와 60여명의 봉사자 덕분입니다. 이 모든 분께 다시금 감사를 드립니다.
어제 봉사에는 저를 포함해서 모두 16명이 참여했는데, 저희 가운데에서 6명은 어린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모두는 여러 번 감동을 받았는데, 이는 뽀르찌웅꿀라 형제자매님들이 보여준 배려심 깊은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많은 분들은 여전히 마스크를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저희 쪽으로 선뜻 다가오지를 않고, 자신의 옷 소매 등으로 먼저 코와 입부분을 가린 다음에, 충분한 거리 두기를 유지한 채, 저희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혹시라도 저희에게 피해를 줄 까봐 조심하는 것 같았고, 더군다나 어린 학생들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그대로 읽혀 져서, 줄곧 흐뭇하고 고마웠으며, 어제도 모두의 안전과 건강을 빌고 돌아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대림절 첫번째 초에 불을 밝혔습니다. 첫번째 초가 상징하는 바는 희망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꿈꾸고 어떤 것을 희망합니까? 여러분의 가정에서, 그리고 우리 공동체에서 무엇을 꿈꾸고 어떤 것을 희망합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 때문에 꿈이 더욱 커지고 날마다 희망이 자라납니까? 신앙인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희망입니다. 막연하고 어렴풋한 희망이 아니라 확고한 희망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이 있는 데, 사실 우리 신앙인의 태도가 바로 이래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지라도, 예수님 때문에,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 까지도 우리를 넘겨 감옥에 가두고 죽일지라도, 그럴지라도, 우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게 표징이 일어나고, 다시 말해, 지구의 종말을 맞아 하늘이 무너져 내릴지라도, 사람들이 모두 공포에 질려 몸이 자지러지고 수많은 사람이 모두 다 기절할 지라도, 설사 그럴 때가 정녕 온다고 할지라도,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수가 있습니다.
신앙인의 365일 위기대응 매뉴얼에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예수님 때문에 솟아날 구멍이 있습니다. 지구의 종말이 닥쳐도, 아니 오늘 당장 죽어도, 영원한 생명이 시작된다고 믿고 희망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바로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고난을 겪을지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희망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인은 남들과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방탕과 만취 그리고 일상의 근심으로 그저 그렇게, 다시 말해 별 긴장감없이 해이해지고 게을러져서, 대충대충 물러져서 살고 있다 할지라도, 그럴지라도 우리는 늘 깨어 기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코로나처럼, 예상치 못한 재난이 닥쳐 모두가 자지러지고 몸을 움츠릴지라도, 그럴 때라도 신앙인은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예수님 때문에, 또 예수님 이름으로, 작은 일이라도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작년 대림 제 1 주일을 떠올려 봅니다. 코로나로 실내 미사가 금지되었고, 파킹장에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 때만 해도 우리 중에는 아무도 백신을 맞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 일일 신규 확진자 수는 5천을 넘으면서 가파르게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 1년이 지난 오늘은 여러가지로 상황이 나아 지긴 했지만, 새로 발견된 변이 바이러스, 오미크론으로 세계는 또다시 근심에 빠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깨어서 해야 할 보속이 있고, 우리가 지금 깨어서 해야 할 기도가 있고, 우리가 지금 깨어서 해야 할 사랑과 봉사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희망합니까? 언젠가 우리도 하늘의 성인들처럼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꿈을 꿉시다. 그리고 그 꿈을 꾸며 또 다시 회개하는 은총, 오늘도 기도하는 은총, 새롭게 봉사하는 은총을 구합시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뭐니 뭐니 해도, 내 집 같은 곳이 없습니다. 병원에 딱 하루 만 입원해도, 집 생각이 굴뚝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가족 품이 그립고, 집이 그립고, 고향이 그리워도, 갈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북한의 실향민들이 그렇습니다. 길고 긴 분단의 세월을 눈물과 한숨으로 지새우다, 결국은 그 한을 다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고향에 갈 수 없어, 분하고 억울한 사람들은, 사실 언제나 있었고, 어디에나 지금도 있습니다. 그 옛날(B.C. 586년) 바빌론으로 붙잡혀간 유대인도 생이별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낯선 이국땅에서의 유배 생활이 어언 50년쯤 되어 갈 때, 꿈도 꾸지 못했던 일,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칙령(B.C. 536년)으로, 마침내 부모의 땅,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겁니다.
오늘 화답송에서, 시편 저자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주님이 귀양에서 풀어 주실 때, 우리는 마치 꿈꾸는 듯하였네, 우리 입에는 웃음이 넘치고, 우리 혀에는 환성이 가득 찼네. (시편 126) 적들에게 맨발로 끌려갔던 백성들이(1 독서)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이렇게 웃으며 돌아오게 됩니다.
오늘 제 1 독서의 관점은 분명합니다. 이들을 유배 생활에서 해방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고향으로 데리고 오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요사이 뉴스를 보면, 위험에 빠진 자기 나라 국민을 구출해 오기 위해, 국가에서 특별기를 보내는 경우를 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친히 데리고 오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안전하고 편리한 귀환을 위해 높은 산과 언덕은 낮아지고, 골짜기는 평지가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이 입고 있는 슬픔과 재앙의 옷을 벗겨 주시고, 당신 영광으로 아름답게 입혀 주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 제 1 독서를 묵상하면서 탕자의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이야말로 집 나가서 제대로 톡톡히 고생한 인물입니다. 개고생이라는 말이 딱 맞을 것 같습니다. 돼지를 치면서도, 사람 음식이 오히려 돼지보다 못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버지는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었습니다.
대림시기는 귀양살이에서 예루살렘, 곧 하느님의 집으로 돌아오는 시기입니다. 대림시기는 아버지의 집, 아버지가 지금도 문밖에서 기다리고 서 계시는 우리 집으로 돌아오는 시기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예수님이 계신 곳이 영원히 우리 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하느님이시고 주님이시고 형님이시고 가족입니다. 그분의 형제가 우리의 형제이고, 그분의 가족이 우리의 가족입니다. 살아서도, 예수님 계신 곳이 우리 집이고, 죽어서도, 예수님 계신 곳이 우리 집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 있다면, 이 말은 곧 우리가 우리 집을 떠나 있다는 것이고, 이 말은 우리가 지금 고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고생 그만하고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우리는 몹시 기뻤노라 라는 성가 가사가 있습니다.(성가 426장) 이는 시편 122편에서 딴 구절입니다. “주님의 집으로 가세!”사람들이 나에게 이를 제 나는 기뻤네.” 대림시기는 우리가 주님의 집으로 돌아 가는 때이고, 대림시기는 주위 사람에게도 집에 같이 가자고 말하는 시기입니다. “이제, 주님의 집으로 같이 갑시다!”
주님의 집에 가기 위해선, 지금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없애고, 가장 빠르고 가장 편한 길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그 길은 내가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는 회개의 길이고, 주님께서 마중 나오시며 내 쪽으로 오실 은총의 길이고, 함께 만나, 주님께서 나와 같이, 나란히 걸어 주실 진리와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의 높은 산은 보이는 대로 허물고 닥치는 대로 무너뜨려야 합니다. 반대로 낙심이나 절망, 내 마음속 깊은 곳, 어둠의 골짜기는 다른 걸로 메꾸고 채워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바치는 기도가 얼마나 턱없이 낮고 얕으며, 우리가 이웃과 나누는 사랑과 자선이 또 얼마나 턱없이 낮고 얕습니까? 우리 각자의 골짜기를 기도로 채우고, 보속으로 채우고, 선행으로 채우고, 자선으로 채워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 하기 위해 매일 정성껏 부지런히 준비해 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