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현은 나타남, 드러남, 보여줌을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는데, 교회는 특별히 3가지 사건에 초점을 두고 이를 기념합니다. 첫 번째는 주님의 성탄, 두 번째는 주님 공현 대축일, 그리고 세 번째는 주님의 세례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탄생을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모습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뵙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십니다. 둘째, 하느님은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민족을 위한 하느님이십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 다시 말해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도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분께서는 특정 시간이나 장소 혹은 종교에 갇혀 있지 않으시고, 모든 세대, 온 인류를 위한 구세주이십니다. 세 번째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공생활을 세례로 시작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까지 말씀과 행동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별의 인도가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박사들이 예수님 계신 곳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별빛으로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당신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고, 모두가 당신을 만날 수 있도록, 이제는 우리가 별이 되어 이웃을 인도 해 주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바리사이처럼 입술로만 하느님을 공경해서도 안 되고, 율법 학자들처럼 지식만 높아서도 안 됩니다.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헤로데처럼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2019년 공현 대축일 강론)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만 그치지 말고, 우리도 동방박사들처럼 진실하게 경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중도에서 발길을 되돌리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구경꾼처럼 문 앞에 서서 구경만 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얻으러 간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를 위해 오신 하느님께 예물을 바쳤습니다. 이는 우리 모두 가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복음의 동방박사들은 모든 진실한 신앙인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동방박사들처럼 예수님을 찾아 먼 길을 왔습니다. 동방박사를 인도해 주셨듯이, 우리를 예수님에게로 불러 주신 분도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임금을 위한 황금, 하느님을 위한 유향, 죽은 자를 위한 몰약을 준비해 오지는 못했지만,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우리의 주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우러러 흠숭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우리의 찬미를, 우리의 생각을,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정성껏 바쳐 드립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웃을 위한 예물을 주님께 바칩니다. 이 모두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감사의 표시입니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 미사를 드리며, 박사들을 비추었던 베들레헴의 별처럼 우리 또한 가족과 이웃을 비추는 주님의 별이 되겠다고 다같이 다짐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우리 각자가 그리고 우리 공동체가 이웃을 위한 주님의 별이 되어, 그리스도의 빛을 더욱 아름답게 반사 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합시다.
엊그제 성탄 미사 때 우리 마태오 성당 봉사자들의 품격에 대해 잠깐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공동체가 흉내를 내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히 우리에게 있고, 정말이지, 숨은 우리 봉사자들의 땀과 정성이 남다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 더 도와야 하고, 힘들수록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고 요즘 부쩍 더 강조 드리고 있습니다만, 이걸 이심전심이라고 합니까? 올 성탄 구유예물은 자그마치 12,349 불입니다. 해마다 7천불 안팎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물론 그 또한 미국 성당이 깜짝 놀라며 부러워하던 액수였습니다만, 올해는 더군다나 코로나로, 정말 모두다 더 힘들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기부해 주셨습니다.
두 손 모아 구유 앞에서, 혹은 온라인으로, 혹은 우편으로, 한푼 두푼 모여진 액수가 이렇게나 많이 불어났습니다. 효율적으로 잘만 사용한다면, 이삼천명의 노숙인들에게 한끼, 따뜻하게 대접해 드릴 수 있는 액수입니다. 마태오 성당의 품격이 다르다는 말은 그냥 제가 여러분 듣기 좋아라고, 혹은 그냥 한번 웃자고 하는 이야기가 절대 아닙니다. 실제 여러분은 남다릅니다. 여러분이 자랑스럽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가정 대축일을 맞이하였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이 우리 성당에 꾸며놓은 구유만큼이나, 그리고 꿈처럼 달콤한 동화처럼 아름다웠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크게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백설 공주처럼, “그리고 그들은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여러분은 성경을 다시 읽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셨고, 한치도 다름없이, 인간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도 아기 때는 똥 기저귀가 필요했을 것이고, 사춘기 때는 보통 애들처럼 예민하셨을 것입니다. 성모님도 마찬가지셨겠죠. 빵도 여러 번 태우셨을 것이고, 성 요셉은 일하기 싫어 요리조리 요령을 피울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성가정이 우리와는 달리, 너무너무 선하시고, 너무너무 아름답고, 너무너무 깨끗하고, 너무너무 화목했다면, 그래서 우리가 도저히 본받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성가정 대축일을 지낼 이유는 없어지고 맙니다. (W. J. Grimm)
성가정, 거룩한 가정, 여기서 성, 거룩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거룩한 전당, 성당, 거룩한 직무를 맡은 성직자, 거룩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완전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성가정이 완전한 가정이었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사실은 끔찍한 가정이었습니다. 젊은 어머니는 길거리나 다름없는 마구간에서 출산했고, 난민이 되어 외국으로 도망친 적도 있습니다. 시메온의 예언처럼 성모님의 영혼은 칼에 꿰찔리셨는데, 그게 한두 번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집안은 사형수가 있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 가정은 지극히 거룩한 가정으로 불리지 않습니까? 정확히 거룩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요?
분명히 나자렛의 성가정은 일반 가정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가족입니다. 거룩함의 일차적 의미는 ‘구별되다, 분리되다’ 입니다. 성가정은 온전히 하느님께 바쳐진 가족입니다. 예수님께서 온전히 당신 삶의 전부를 인류구원을 위해 바치셨다면, 성가정 또한 제단에 바쳐진 거룩한 제물처럼, 향기는 뿜어내지만, 그 스스로는 다 태워 없어지고 마는 번제물과도 같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가 성가정을 닮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거룩함의 또 다른 측면을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도 성가정을 닮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은 우리가 절대 가까이 갈 수 없는 거룩함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도 하느님을 체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이 거룩한 시간이고, 여기가 거룩한 장소이고,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육화로 인해 수많은 성인들도 탄생 할 수 있었습니다.
거룩함, holy는 healthy 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거룩함은 일종의 건강함으로부터 옵니다. 건강한 가정이 거룩한 가정을 만듭니다. 신체적인 건강은 자신감을 줍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마음속에 확신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정말 사랑하고 계시다는 확신 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합니다. 누가 나를 오해하고, 폄훼하고, 모략할지라도, 하느님 사랑으로 시작한 일 일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고 거룩한 사람입니다.
건강을 위해 혹은 의사가 시켜서 억지로, 마지 못해, 힘들게 팔굽혀 펴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뛰는 게 즐거워서 누가 말려도 아침마다 뛰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룩함도 그렇습니다. 애써 거룩해 질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다 거룩해지지는 않습니다. 억지로 매일 기도 한다고 해서 성인이 되지는 않습니다. 거룩함은 일종의 결과입니다. 기쁘게 봉사하고, 웃으며 자선하고, 즐겁게 찬양 드리고, 행복하게 칭찬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저절로 나도, 이웃도, 우리 가족도 거룩하게 변합니다.
여러분이 뭘 해도 헐뜯는 사람은 여러분을 헐뜯습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뭘 해도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은 끝까지 사랑해 줍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이 뭘 해도 사랑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가정은 이런 하느님을 닮은 가정입니다. 적어도 천주교 신자라면, 적어도 마태오 성당에 다니고 있다면, 무조건 헐뜯는 사람이 되어선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콜로 3, 13).
우리 성당에 피어 있는 꽃도, 새도, 가끔 오는 너구리와 매일 오는 고양이도, 말할 것도 없이 여러분도 저에겐 가족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는 여러분들이 보살피는 가족이 있습니다. 성모님처럼 가족 때문에 여러분도 영혼이 칼에 찔리듯 고통스러울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족은 가족입니다. 가족 중에 누가 뭘 한다 해도, 가족을 미워해선 안 됩니다. 가족을 비난하면 안 됩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가족이 왜 가족입니까? 사랑해서 가족이 된 것입니다. 가족으로 만들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내 가족에게 오늘은 사랑을 고백하는 그런 축제의 날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오늘 구세주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하느님께서는 어둠 속을 걷던 백성,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으로 오셨습니다.” (1 독서) 코로나 사태로 암울했던 한 해를 보낸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사랑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성자께서 주시는 위로와 희망 그리고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시길 빕니다.
어제 성탄 대축일 밤 미사 공지사항에서 말씀드렸던 내용을 오늘 한 번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요지는 우리 마태오 성당 봉사자들의 품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른 성당이 흉내 내거나 따라올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유를 봅시다. 벌써 소문을 듣고 한국에서도 연락이 옵니다. “마태오 성당 구유가 이쁘네요.” 어디 구유만 이쁩니까? 구유로 이어지는 장미 꽃길이 그렇고, 여기 패티오의 장미 넝쿨과 조명,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가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이 아름다움은 다른 성당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제 한 이야기를 오늘 또 말씀드리는 이유는 어제 못 오신 분들이 많으셨고, 무엇보다 지금 이 미사는 방송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시청하시는 분들 중에는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다른 성당에 다니는 교우분들이 있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대놓고 자랑질하고 싶은거죠.
우리 봉사자들의 정성이 남다릅니다. 현재 나홀로 성가대의 유일한 성가대원인 지휘자님은 성가 단원들의 노래를 일일이 개별적으로 녹음한 다음, 역시 우리 성당 전문가들의 손을 거쳐 마치 생생하게 합창을 부르는 것 처럼 성탄 대축일 성가를 들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 말고 또 어느 성당이 그렇게 하고 있을까요? 우리 교우분들이 혹시라도 추우실까봐 케노피를 교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기 집의 히터를 기증하신 분도 있고, 구입하라고 기부 하신 분도 있어서, 보시다시피 9개의 히터를 언제든지 가동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사들 같이 정성으로 임하는 복사들이나, 미사 전이면 낙엽 하나 보이지 않게 언제나 말끔히 치우는 분들이 한결같이 고마운 우리 교우들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도 없고, 만족해서도 안 됩니다. 에수님께서는 춥고 냄새나고 더러운 마구간으로 오셨고, 우리가 만나야 할 형제들이 춥고 냄새나고 더러운 길거리에서 날마다 죽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우리 교우로부터 전해 받은 동영상(출처미상)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껏 어디에 있었는가? 잠잠히 기도할 줄도 묵묵히 가난한 이 찾을 줄도 모른 채, 그저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 받을” (요한5, 44)뿐이었으면서, 예수님 마음에는 관심도 없었으면서, 그저 위로받기만을 가지 만족만을 좇아왔을 뿐이면서, 그게 신앙인 줄 착각하고 있진 않았나? 나는 무엇을 위해서 성체를 모셔왔나?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주님을 찾고 있나,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주님에게서 멀어져 있나? 그리고 이 동영상의 마지막 구절이 화살처럼 제 가슴에 꽂혔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의 속에서도 형제애를 배우지 못한다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런 시련을 겪으면서도 형제애를 배우지 못하고 또 실천하지 못한다면, 우리 인생에서 과연 뭐가 남을 수 있겠습니까? 코로나로 인해 내 건강이 중요하고, 우리 가족의 안위가 그 무엇보다도 더 절실해져서일까요? 눈에 보이는 이웃에게도, 우리의 전부이신 하느님에게도 오히려 전보다 더 소홀해지지는 않으셨는지요? 어려울 때일수록 더 기도하고, 그럴수록 서로가 힘을 합쳐 더 도와야 하는 줄을 모르는 사람이 우리 중에는 한 명도 없을 텐데 말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너무 가난하여 선물도 준비하지 못한 채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간 목동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다른 목동들이 앞다투어 선물을 바칠 때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에 멀찍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을 그 목동을 성모님께서는 당신 가까이 오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빈손이던 그 목동의 양팔에 구세주를 안겨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그보다 더 위대한 선물이 또 어디 있을까요? 끝없이 펼쳐진 바다라 할지라도 다 담을 수 없는 분, 우주보다도 크시고 은하수보다도 아름다우신 분을 별안간 받아 안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한 것이라고는 미천하기 그지없는 우리들입니다. 자격도 공로도 없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전부를 내어 주셨습니다.
성탄의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누구라 할지라도 조건 없이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 그런데 그 사랑은 목동이 그랬던 것처럼, 도저히 혼자만 안고서 볼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고, 안겨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어렴풋이 나마 이해 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이 되시어 우리 곁에 오신 하느님 사랑의 깊이는 우리가 그분 육화의 겸손과 그분 십자가의 사랑에 동참하게 될 때, 오직 그때에만 비로소 어렴풋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칸 사상의 학문적 전통)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한 1, 19) 그렇게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티토 2, 11) 하느님의 오묘한 신비, 그 사랑의 높이와 깊이, 너비와 길이로 그 빛은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그 얼마나 무궁하시며, 그 사랑의 풍요로움이 그 얼마나 무한하신지요!
그 사랑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감탄하고 찬양 드립시다. 다시금 예수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우리 구원자, 우리 동료, 우리 형님, 우리 주님,”(성 프란치스코) 우리 하느님께서 오늘 탄생하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오늘 밤 구세주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하느님께서는 어둠 속을 걷던 백성,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으로 오셨습니다.” (1 독서) 어느때 보다도 암울했던 한 해를 보낸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사랑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성자께서 주시는 위로와 희망 그리고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시길 빕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처음으로 구유를 만들 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아기가 겪은 그 불편함을 보고 싶고, 또한 아기가 구유에 어떻게 누워 있었는지, 짚북데기 위에서 그리고 소와 당나귀 옆에서 어떤 모양으로 누워 있었는지를 내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1 첼라노 30, 84) 평상시라면 여느 때처럼, 아늑하고 고급스러운 실내조명 아래 평화로이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뵈었겠지만, 오늘 우리는 찬 공기를 견디며 구유가 마련된 바깥 장소로 경배를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이긴 하지만 성가정이 겪으셨을 고초를 조금은 떠올려 볼 수가 있었습니다. 춥고 냄새나고 더러운 곳!
마구간, 그곳은 인간의 욕심을 위해 노예처럼 부리는 가축을 가두어 두던 곳이 아니겠습니까? 그곳은 사람이 온전히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동물처럼 학대받고 버려지는 곳! 그곳은, 예수님께서 태어난 곳이며, 우리가 찾아가야 할 형제가 있는 곳이며, 누구라도 주님을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장소입니다. 왜냐하면, 헐벗은 자,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병들거나 감옥에 갇힌 자,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당에도 한 번 오신 적이 있어서 여러분도 기억하실 텐데, 이 소피아 수녀님으로부터 엊그제 전화가 왔습니다. 수녀님은 코로나가 생기면서부터 줄곧 손수 마스크를 만들어 주변에 나누어 주고 있는데, 그 일로 인해 올 한 해 얼마나 바빴는지, 그리고 음식을 만들어 노숙자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지속해서 해 오고 있는데, 이 일이 얼마나 기쁜지를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에도 도움을 청해 오셨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듯이, 코로나로 인해 도움이 필요한 곳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와 우리 가족의 건강과 안위가 너무 절실해져서 일까요? 이웃에게도 그렇고 하느님께도 그렇고 혹여 그전보다도 더 소홀해지지는 않았는지요? 어려운 때일수록,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도와야 하는 줄을 모르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교황님께서 작년 성탄절 밤 미사 강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달려간 목동들은 예수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해 갔지만, 그중에서 한 사람은 너무 가난해서 선물을 준비해 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다른 목동들은 모두 다 앞다투어 선물을 바치고 있는데, 빈손이던 이 목동은 멀리 떨어져서 난처해하며 서 있었습니다. 그때 빈손으로 온 목동을 보시고 성모님께서는 가까이 오라고 청하셨고, 아기 예수님을 그의 팔에 안겨 주셨습니다. 이때 목동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느낍니다. 자신은 아무런 자격도 없는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선물을 두 팔에 안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선물 중의 선물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계속 안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황님께서 해 주신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천사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그날 밤 목동에게 전합니다. 목동은 한편으로는 소외되고 낮은 계층을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목동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 주위로부터 무시당하며 살았던 사람들, 냄새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정결례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믿을 수 없는 사람들로 낙인이 찍혀서 재판정에서 증인으로도 설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목동들은 다른 한편으로 단순히 평범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처럼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온갖 약점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지극히 사랑해 주십니다. 빈손으로 경배 왔던 그 가난한 목동처럼 우리 또한 주님 가까이에 다가설 자격이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선물로 내어 주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이고, 2 독서 말씀대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 입니다.”(티토 2, 11)
바오로 사도는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성탄은 선물로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웃에게 기꺼이 선물이 되어 주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고, 하느님과 이웃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날입니다. 두 팔로 예수님을 받아 안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 마음속에선 두려움과 “걱정이 사라지고, 기쁨이 태어나고, 축제가 시작됩니다.” (베네딕토 교황님 성탄 강론)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 천사는 이것이 우리를 위한 표징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순진하고 귀여운 아기의 모습만 떠올린다면 우리는 참된 표징을 놓치고 맙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유하시지만 나약하고 무능한 인간 아기의 모습으로, 지극히 가난하고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거기에는 단 한 가지의 이유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입니다. 오늘 밤, 우리의 구원자 하느님을 우러러 감탄하고, 기뻐하며 찬양합시다. 코로나로 고통받는 우리를 보살펴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우리 또한 그분의 손과 발이 되어 줄 수 있는 은총을 이 거룩한 밤에 청합시다.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소.”(사무엘 하 7, 2) 다윗은 하느님께서 머무실 집을 지어드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소망을 꺾으시고 오히려 다윗의 집안을 일으켜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사무엘 하 7, 12) 근시안적으로 본다면 그 후손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틀림없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당신의 외아들, 그리스도를 일컫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머무실 집은 그리스도 안에 지어지고, 바위처럼 튼튼한 그 집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모시고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정해 두신 장소이며, 그곳에 그들을 심어 그들이 제자리에 살게 할 것입니다. (사무엘 하 7, 10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손꼽아 기다렸던 다윗의 자손, 온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해 주실 메시아의 탄생은 구세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도 가장 결정적이었던 신앙 행위, 성모님의 바로 이 응답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2, 38)
성모님을 찾아온 천사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전달해 줍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잉태하여 하느님의 아들을 낳으리라는 이 말을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로 인해 장차 겪게 될 일들을 어디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언제 어떻게 어떤 고난이 닥칠지 모를 일입니다. 당장이라도 요셉과의 약혼은 파국으로 치닫고, 어쩌면 돌을 맞고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을 바라고 계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말입니다. 성자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가 없으셨겠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아셨습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은 하느님께 자신의 전부를 바쳐 드리기로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모님의 신앙입니다.
성모님의 대답은 전적이면서 무조건적인 수락이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성모님의 말씀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필기용 서판입니다. 작가이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뭐든지 다 적히게 해주소서.”(R. Cantalamessa, Mary: Mirror of the Church. P.39 재인용)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은총으로 가득 채워 주셨는데, 성모님께서는 이렇듯 충만한 신앙으로 보답하셨던 것입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성모님을 찬양하며 이렇게 여쭙고 있습니다. “복되신 동정녀여, 믿음에 대해서는 마음을 여시고, 승낙하기 위해서는 입술을, 창조주에게는 당신의 모태를 열어 주소서. 보소서. 모든 민족이 기다리던 분이 문밖에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아, 당신이 머뭇거리시다가 그분이 지나쳐 버리시어, 당신의 영혼이 슬픔 속에서 사랑하는 이를 찾아 나서야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바로 일어나 달려가시어 문을 여소서.”(졸역,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동정 성모께 대한 찬가)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의 응답, 성모님의 yes, 성모님의 ‘아멘’을 통해 성모님 안에서 당신의 거처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도 거처하시기 위해 문밖에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위한 집을 우리 마음속에 만들어 드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머물 집을 하늘에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모른 채 외면하며 살아왔는지요? 베르나르도 성인의 말씀처럼 그러다 그분이 지나쳐 버리신다면 그땐 정말 어찌하겠습니까?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소.” 궁전은 아닐지라도 우리에겐 잠자리가 있고 가족이 있습니다. 다윗이 하느님의 거소를 걱정하였듯이, 차가운 거리의 천막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나그네 된 이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시며, 마치 당신을 대하듯이 그들에게 해주라는 말씀에 우리 또한 “이루어지소서,” yes, ‘아멘’으로 응답합시다.
코로나로 모두에게 다 힘들었던 한 해였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면 우리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념하게 됩니다. 올해만큼은 다른 어떤 때 보다 더 따뜻이 주님을 맞이하고, 웃는 낯으로 반겨 드립시다. 올해는 또 얼마나 더 힘드셨을지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시든 그 크신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겨 드릴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우리 어머니처럼 말입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 Gaudete in Domino semper: iterum dico, gaudete 오늘은 입당송의 첫 구절을 따서 Gaudete Sunday (기뻐하여라 주일) 이라고도 하고, 장미주일 이라고도 부르는, 이른바 기쁨의 주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외부적인 환경이나 조건에서 기인하지 않고, “살아계시는 참 하느님과 맺는 생생하고 인격적인 관계”(가톨릭 교회 교리서, 2258) 로부터 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어떠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헤쳐 나갈 힘을 얻게 됩니다. 이는 자극적인 쾌락도, 성취의 희열도, 소유의 즐거움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고(갈라 5, 22 참조),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얻게 되는 위안이자 평화입니다.
이러한 기쁨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일종의 생활양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테살 5,16) 내가 처한 환경이나 조건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타인이 나에게 대하는 부당한 말이나 태도로 부터도 평정심을 누릴 수 있다는 게, 정말 가능하긴 한가요? 늘 어떻게 기쁘게만 살 수 있겠습니까? 바오로 사도께서 나란히 제시하신 두 가지 안에서 우리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바로, 기도와 감사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더욱 깊이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그 분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감사는 우리가 받아서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이 다름아닌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케난 오스본 신부님은 기도와 감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두렵고 겸허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 감사드리는 행위이며, 이 현존에 관해 이해하게 된 것을 더 원하고 더 사랑하게 만드는 행위이다. 기도는 하느님의 사랑의 현존에로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이끌어 준다.”(프란치스칸 사상의 학문적 전통) 그런데 적잖은 사람들은 미사에 와서도 감사하지 못하고, 성체를 영하는데도 기쁨이 없고, 신앙인이면서도 기도를 부담스러워합니다. 왜 그럴까요? 베네딕도 16세 교황님께서 지적하신 적 있듯이,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이해 하지 않고, 관습이나 윤리 체계로 잘 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를 기쁨의 원천으로 받아 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대림시기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과거의 만남을 기리고, 현재의 만남을 소중히 만들고, 장차 있을 만남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의 시선이 반드시 그분을 향해야 하고, 우리의 마음은 반드시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지금 이 시간도 외치고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이렇듯 요한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준비 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요한이 받았던 이 질문이 우리에게도 던져진다면 어떻게 대답 하시겠습니까? 요한이 자신의 사명을 깨달은 데는, 오시는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올바르게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은 대중의 폭넓은 인기와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도, 자신은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주님의 종의 한 사람으로서 응당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고, 거기엔 언제나 주님의 도움이 필요 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요한을 닮는 다면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에 보다 자신 있게 대답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요한 주위로 몰려 몰렸었고, 그에게 구원에 이르는 길을 물었습니다(루카 3,10).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나누어 주고, 지급받는 봉급으로 만족하고, 강탈이나 갈취가 있어서도 안된다는 조언을 들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지혜를 찾아, 혹은 보다 행복한 삶을 위해, 끊임없이 스타 강사를 찾아 내어,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고 좋아요 버튼을 누릅니다. 그러나 좋은 말씀을 듣는다고만 해서 모두가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되고, 그 너머로 세례자 요한이 가리키고 있는 분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일생을 통해 끊임없이 요한과 같은 맨토를 쫓으면서 살아 가거나 아니면 지금 당장이라도 성탄의 선물을 받아 들이거나, 이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미 주어졌기에 성탄절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매순간 그분 사랑 속에 살아 가는 것! 기쁨은 이처럼 멀리 있지 않습니다. 성모님의 노래가 나와 우리 가족의 일상적인 찬양이 될 수 있도록 오늘도 어머니의 전구를 청합시다. “내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내 마음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 46-47; 화답송). 아멘.
오늘 전례 말씀 속에서 우리는 두가지 중심 주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위로이며 두번째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이사야 예언서의 제 2 부로 일컬어지는, 40장부터 55장까지는 위로의 책이라 불릴 정도로 하느님의 위로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맨 첫번째 부분인 오늘 제 1 독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내 백성을,”당시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생활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꿈 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일, 기적처럼 새로운 시대가 다가 오고 있었습니다. 바빌론이 페르시아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페루시아의 임금 키루스는 바빌론이 정복했던 여러 민족들에 대해 융화정책을 펼쳤었고, 이런 정책에 따라 각 민족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해 줍니다. 키루스의 등장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비로소 희망을 보게 됩니다. 키루스의 칙령으로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폐허에서도 마침내 성전을 제건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이사야 예언자는 해방에 대한 벅찬 희망을 안고, 하느님의 위로를 다정하면서도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게 되고, 죗값도 충분히 치러졌고, 이제 곧 주님께서 오실 것이라고 외칩니다. 그렇게 백성들의 늘어진 어깨위로 힘찬 기운을 북돋아 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때 보다도 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위로해야 할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코로나 대유행으로 미국에서는 지금까지 28만명이 넘게 사망하였고, 앞으로 넉달 동안 자그마치 26만명이 더 사망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보도되고 있습니다.(워싱턴 대) 하루 확진자 수가 칠팔 천명에 이르게 된 로스앤젤레스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가족을 잃고 그 큰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웃들에게 우리는 어떤 말로 위로를 할 수 있을까요?
직접 겪어 보지 못하였기에 어떤 말로 위로 해야 할지 그저 막막하기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변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로하고 계시다는 바로 이 사실, 말입니다. 그 분은 1 독서 말씀 대로, 양치기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고,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안에서 단 한번만이라도 커다란 위안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위로를 더 잘 전해 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비로우신 주님을 닮게 되고, 우리 또한 목자의 마음으로 이웃을 보살피기 시작하면,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위로는 머지않아 그들 안에서 확고한 희망이 되고 꺼지지 않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전례 말씀의 두번째 주제는 주님의 길을 내는 일입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내어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집트 종살이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셨던 하느님께서는 바빌론의 지배로 부터도 해방시켜, 이번에도 거친 광야에서 당신 백성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서 먼저 준비 할 것이 있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채우고, 험하고 높은 곳은 깍아 내면서, 주님께서 오실 길을 평평하게 펴야만 합니다.
늘 부족한 기도, 언제나 부족한 자선, 한사코 부족하기만 한 신앙은 채워 나가고, 턱없이 높아만 져 있는 헛된 자만심과 보기 흉한 교만은 이제 그만 내려 놓아야 하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했듯이, 자신을 낮출 수 있을 때에, 하느님의 영광은 빛을 발하게 됩니다. 비뚤어지고 거칠어진 마음으로는 주님을 모실 수가 없습니다. 회개하고 마음을 올바르게 가지지 않고서는 주님을 모실 수가 없습니다.
위로 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이 두가지는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입니다. 코로나에게 모든 이목을 빼앗긴 채, 충격과 슬픔, 공포와 좌절 속으로 끝 모르게 빠져 들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나와 내 가족만 괜찮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어느때 보다도 기도와 자선이 절실히 요구 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나태해져서, 더욱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한치 앞도 보기 힘든 광야의 모래 푹풍이 더욱 거세게 휘몰아 칠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커갈수록 서로 더 위로하고, 광야의 폭풍 가운데서도 울리는 소리, 회개에로의 요청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크신 사랑과 은총으로 지금도 우리를 위로해 주고 계십니다. 기뻐합시다. 불 같은 성령의 힘으로 우리 모두를 이끌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림절 첫날, 새 아침입니다. 전세계 교회는 올해도 어김없이, 첫번째 대림초, 희망의 초에 불을 밝힙니다. 사상초유의 코로나 19사태가 연일 정점으로 치닫고 있는 이때에, 여러분, 올해 대림절을 맞는 감회가 어떠세요? 희망적입니까? 기쁩니까? 아니면 두렵고 혼란스럽습니까? 저는 이번 대림절이 무엇보다 우리 모두에게 회복의 시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응답송의 시편 기도를 몇 번이고 거듭해서 되뇌이게 됩니다.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코로나 19로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분들이 우리 가운데에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번도 감염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은 가시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샤워를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행도, 외식도, 휴가도, 모임도 일체 못하고 산지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납니다. 하지만 직장을 잃거나 가게를 접은 사람들의 고통에 비한다면, 이정도는 별 것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나 없이 외출이 줄어들고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 졌습니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했습니까? 오히려 이 기회를 잘 활용해서, 평소에는 바빠서 엄두도 못 내던 일, 뭔가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일들을 계획도 해 봅니다. 하지만 시간이 많다고 해서 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닫고, 이내 포기하고 맙니다. 집에 있으면 기도도 더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성경도 더 많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묵주 보다는 tv 리모콘을 더 자주 찾게 되고, 성경 보다는 Netflix와 더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제 드라마도 영화도 뭘 봐도 별로 재미없다고 말입니다.
갈수록 게을러 지고, 의욕도 활기도 많이 줄었습니다. 현재의 코로나 상황을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그러나 지금이야 말로 다시 일어설 때입니다.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 되리이다” 지금은 복구나 회복을 생각할 때입니다. 활력을 되찾기 위한 방법으로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적당한 운동, 자연과의 만남, 좋은 인간 관계의 유지, 종교 예식 참여 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화나 문자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온라인으로 묵주기도를 함께 바치는 것도 큰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보다 근본적인 회복, 신앙의 복원에 대해서는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요?
오늘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어찌하여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어찌하여 이렇게, 그들 마음이 굳어져 주님을 경외할 줄 모르게 되었는지를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경배하는 자가 없어져 버렸다고 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우리 또한 그 모습을 닮아 가고 있지나 않은지요? 그러나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 아버지, 우리는 진흙,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빚으신 분, 우리 모두는 그분의 작품, 하느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우리 가운데로 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빚고 다듬고 매만져 주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고쳐 놓으실 때까지, 그리고 고쳐서 완성하실 때까지”(아우구스티노)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대림시기는 주님의 오심을 묵상하며 준비를 갖추는 시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성모님을 통해 분명,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성체 안에서, 그리고 가장 작은 이 가운데 한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세상 끝 날에는 모든 민족의 심판자이자 완성자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아무도 모르는 까닭에,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깨어 있으라고 분부하십니다. 깨어 기다린 다는 것은 막연하게 시간이 차기만을 기다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라는 뜻입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끝까지 굳건 하라는 뜻입니다(2독서). 그리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진정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그렇게 늘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금 희망을 안고 대림절을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 곁에 다가오신 다는 희망, 그분의 손길로 빚어 지고 다듬어져 회복되고, 더욱 아름다워 질 수 있다는 희망, 마침내 그분 안에서 우리가 완성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깨어 있읍시다. 그리고 기도합시다. 주님, 광채와 함께 나타나소서. 당신 권능을 떨치시어, 저희를 도우러 오소서.(화답송) 하늘을 찢고 어서 내려 오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