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교리는 우리가 도무지 깨달을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세 위격으로 계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각기 하나의 참 하느님이시지만, 본질도 본성도 실체도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열쇠는 하느님의 관계성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자가격리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이 말처럼이나 하느님과 반대되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오직 관계적인 하느님으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삼 위 안에서는 고립이나 단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부나 성령으로부터 분리되거나 격리된 성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성부나 성령으로부터 이탈하여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성자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세상과 단절하고 하늘나라에서 자기격리에 들어간 성령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관계성을 5분만 더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을 우리는 육화라고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참된 신성과 참된 인성이 결합됩니다. 이렇게 육화는 하느님과 피조물이 서로 관련되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바로 관계적인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천지창조를 생각해 봅시다. 사실 이 창조 자체도 하느님과 피조물이 관련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떠 올려 봅시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시어 성부 오른편에 오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인해 황송하게도 우리 또한 부활의 삶에 초대받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이미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깊이 들어왔는데, 이 같은 삶이 한층 더 높아지고, 더욱 더 가까워지고, 더 깊이 친밀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수많은 학자와 성인들이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을 시도했으나, 그 어떤 설명도 완전했던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연계 안에서 완전한 모델을 결코 영원히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은 유사한 모델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마태오 성당 교우들은 누구나가 다 이해 할 수 있도록 한 끼 나눔 운동을 예로 들어 봅시다. 이 운동에는 크게 세 가지 역할이 있습니다. 물품과 돈을 기부하는 후원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브 라운 봉투에 정성껏 음식과 생필품을 담아 선물을 포장하는 봉사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선물 꾸러미를 우리 뽀 형제자매에게 배달하는 팀이 있습니다.
이 세 개 팀의 역할은 뚜렷이 구별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 팀이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돈을 기부하는 사람이 포장도 하고 배달도 나갑니다. 선물을 포장한 사람은 배달팀이 나갈 때 무사히 다녀오라고 인사합니다. 다른 말로 파견을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이름으로 그리고 사랑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이 세 가지 팀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에서도 하나입니다. 이 세 개의 팀은 내부적으로 사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개의 팀은 외부적으로도 사랑으로 서로 연결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과 전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영원하시고 한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절대자이십니다. 완전무결의 하느님, 하느님의 자유에는 한계가 없고 하느님의 사랑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무궁하십니다. 반대로 우리 인간은, 그리고 모든 피조물은 유한하고, 불완전하고, 변하고 소멸하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오직 하느님과의 관계 만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 때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을 닮을 수 있을 때, 오직 하느님처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 때, 오직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진다면, 이웃사랑에서 멀어진다면, 가족에서 멀어진다면, 친구를 배반한다면, 벗을, 친구로 찾아오신 그 분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다면, 그 끝은 절대적 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어두움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성 마태오의 형제 자매 여러분, 하느님은 관계적인 하느님이십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사랑으로 초대하십니다. 나밖에 모르는 고집불통, 교만 덩어리, 자기 잘 난 것만 떠벌리고 평생을 바보로 악하게만 살아가는 인간에게, 제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속물 덩어리에게, 오늘도 애타게 하느님께서는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습니까?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고, 그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의 힘을 북돋아 주시고, 그분께서 오늘도 우리를 도와주고 계십니다. 서로 사랑하도록 말입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말입니다. 그렇게 너의 하느님과 너의 가족과 너의 이웃과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랑할 때 명령하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그 높이와 깊이, 그 너비와 길이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 얼마나 무궁하시며, 그 얼마나 풍요로우십니까?
옛날 영도 다리 밑에 살던 어떤 거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자식에게 때가 꼬질꼬질한 청동 밥통 하나를 유산으로 물려줬습니다. 어느 부잣집 문 앞에서 주워서 평생 잘 썼는데, 좀 무겁긴 해도 거지 밥통으로는 이만한 게 또 없다며 어린 아들에게 준 겁니다. 이 소년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청동 밥통을 바닥에 놓고 날마다 구걸을 하며 사는데, 어느 날 금은방 주인아저씨가 지나가다가 동전 한 닢을 던져 주었는데, 그대 어쩐지 아저씨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저씨가 혹시나 해서 밥통을 유심히 보니깐. 더럽고 때가 많이 끼어서 그렇지, 이건 분명 순금으로 만들어진 아주 값비싼 보물이었던 겁니다. 아저씨가 아이에게 묻습니다. “아니, 얘야, 이걸 가지고 있는 데, 왜 여기서 구걸하고 사니? 이걸 팔면 당장 집 한 채는 사고도 남겠는데!”(http://frtonyshomilies.com/ 예화 참고)
지어낸 이야기지만, 이 거지 소년이 자기 손에 갖고 있던 황금 보물을 제대로 못 알아보았듯이, 우리 가운데의 성령 현존을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어리석게 삶을 허비하며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성령 안에 사는 사람은, 여러 가지가 하느님의 은총임을 깨닫고, 자기가 받은 은총을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남모르게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사랑과 기쁨, 평화와 인내, 친절과 선, 온유와 절제, 진실의 열매를 더 크게, 더 많이 맺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안타깝게도, 이와는 정반대의 경우가 흔합니다. 적개심과 분쟁. 시기와 질투, 격분과 분열, 거짓과 이간질 등입니다. 성경에서 영(spirit)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Ruach’그리스어로는 ‘Pneuma”인데, 공기를 움직이는 것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바람과 숨(호흡), 눈에 보이지 않는 영, 그리고 힘과 불같은 것들인데, 상쾌하고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을 파괴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따뜻한 숨결, 위로하고 북돋아 주는 말이 있는가 하면, 거친 숨결, 욕설과 비난, 저주와 같은 나쁜 말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머무는 화목한 가정이 있는가 하면, 더러운 영, 악한 영으로 쪼개지고 나뉘어서 영영 사라져버린 단체도 많습니다. 알뜰살뜰하게 조용히 가족과 친지, 이웃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는 곳마다 분열을 조장하고 싸움판, 생지옥을 만들어 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았고, 또 모두가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는데(2 독서), 그런데도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왜 그럴까요?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내버려서 그렇습니다. 은총을 받고도 그 은총이 열매 맺도록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막연히 은총을 바라기만 했지, 그러면서도 늘 죄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이는 받은 은총에 대한 배은망덕입니다. 또한, 생명을 원한다지만 멸망도 함께 자초하는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우유부단하게, 적당히, 죄 속에 머물다 보면 은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대축일 미사를 정성껏 드리는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티모테오에게 하셨던 말씀에 모두 귀를 기울입시다.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2 티모 1, 6) 성령께서는 우리의 죄를 말끔히 없애 주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그분의 현존을 깊이 의식하고, 우리가 받은 은총에 감사하는 생활을 지금부터 해나간다면, 우리는 신앙의 열정과 기쁨을 되찾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다른 파라클리토”(요한 14, 16)라고 부르셨는데, 다른 보호자, 위로자, 격려자, 변호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첫 번째 보호자, 일컬어 원조 위로자이시고, 성령께서는 두 번째 보호자 위로자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상처받은 이웃의 제3 의 위로자가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마다 하느님께서 위로해 주셨듯이, 우리 또한 온갖 어려움을 겪는 이웃을 위로하며 살아갑시다. (1 코란 1, 4-5 참조)
사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모든 가르침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된 것은 성령 강림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기억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생생히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성령의 이끄심으로, 죄는 멀리하고, 또 다른 위로자, 하느님 사랑의 도구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우리 각자가 받은 은사를 다시 불 태울 수 있도록 이 미사 중에 성령의 도우심을 열심히 청합시다.
재미있으라고 하는 이야기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미국 신병 훈련소에서 막 입소한 신입 병사들이 제식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교관이 “앞으로 가!”라고 명령하자, 모두가 일제히 발을 맞추어 행진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훈련병 하나가 꼼짝도 하지 않고 제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걸 보고 화가 난 교관이 그에게 다가가서 한쪽 귀에다 대고 소리를 꽥 지릅니다. “야, 어디 문제 있나?” 훈련병이 씩씩하게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Sir, 문제없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귀에다 대고 교관이 또 소리를 지릅니다. “아니면, 여기에 문제가 있나?” 훈련병이 또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Sir,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왜 말 안 들어? 교관이 야단치자, 그 병사의 대답이 아주 가관이었습니다. 명령을 안 들은 이유가 “자기 이름을 부르지 않아서”랍니다. (http://frtonyshomilies.com/ascension-b-2021-l-21/)
오늘 하늘로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 복음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은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복음을 선포하는 단체입니다. 교회가 오직 우리 교회에만 관심을 가지고, 우리 안에서만 활동하고, 우리 안에서만 봉사한다면, 그건 교회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매 주일 미사에 참례하여, 대영광송에서 노래하듯이, 주님을 기리고, 찬미하고, 흠숭하고, 찬양하고, 주님 영광에 감사드립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몸과 피를 모시고, 매번, 모든 피조물, 다시 말해 아직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로 파견됩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
아! 그런데, 어찌 된 일입니까? 진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서입니까? 주님의 명령인 데도 내가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맡겨진 사명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담스러워도 하고, 혹시라도 이웃에게 부담이라도 줄까 봐 주저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한다? no way, 마치도 mission impossible 나에겐 있을 수 없는 일. 아니, mission ignored 그냥 간단히 무시해 버리는, 쓸모없는 명령이 되고 맙니다.
어제저녁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특강에서는 칸딸라메사 추기경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이 시대에 만연한 가장 위험한 이단이고, 동시에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기차표 없이 열차에 오른 사람과 같습니다. 언제 발각될지 몰라 늘 불안하고, 언제든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내던져질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Mary: the mirror of the Church)
그런데도,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지 않는 사람이 교우 중에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지 못했거나, 아무런 열매도 맺지 않으면서 은총을 헛되게 받았거나,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은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다시금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내려 주시기를 빕시다.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주님 안에서 희망을 보고, 주님 안에 참여할 영광도 볼 수 있기를 빕시다.
복음 선포의 핵심은 이런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이 흘러넘쳐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은총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용서와 자비, 사랑과 호의를 마침내 깨닫고, 그 사랑의 기쁜 소식을 이웃에게 달려가 전하는 것이 복음 선포입니다. 이웃에 복음을 설교하라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는 것, 다시 말해 선한 말과 덕스러운 행동으로, 진실과 사랑으로, 변덕 없이, 변함없이, 기쁨의 한평생, 감사의 한세상을 장엄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하신 놀라우신 일을 만방에 알리는 일,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어 힘을 실어 주십니다. 우리는 한 몸이 되어, 성령의 도움을 받아, 머리이신 주님의 사명을 이어 갑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고, 영광 속에 부활하시어, 지금은 성부 오른편에 오르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 이렇게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메시지는 바로 이 하느님 은총의 메시지, 기쁨의 메시지였고, 이 은총의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사명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몫입니다. 루카 형제님, 나오미 자매님, 사비나 자매님,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오늘 그 사명을 받들면서, 진실로 주님께 응답해 드립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우리 본당 고해실은 팬데믹이 시작되자마자 방역물품을 보관해 두는 방으로 바뀌었습니다. 늘 그 방을 지나다닙니다만, 며칠 전에는 봉사자들이 가지런히 벗어 놓은 고무장갑이 유난히도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울컥하고 가슴에서 무언가 치미는 것을 느꼈습니다. 색이 바랜 고무장갑에는 저마다 주인의 이름이 쓰여 있었는데,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을까 라고 생각하니, 그날따라, 이분들에 대한 고마움이 얼마나 크게 느껴지던지, 동시에 미안한 마음 또한 얼마나 컸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성당 문이 다시 열리던 날을 여러분은 기억하시죠? 작년 6월 21일이었습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어느새 1년이 다 되어 갑니다만, 말 한마디 불평도 없이, 성당 의자를 소독하고 있습니다. 말과 혀가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수고가 있기에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는 안심하고 미사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려, 너나없이 몸을 사리고 있던 무렵에도, 다른 사람으로 바꿔 달라 요청한 적 없었고, 그때도 지금도 웃으면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랑 아니겠습니까? 내어 주는 사랑이며, 예수님을 닮은 사랑입니다.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이튿날에, 저는 낯선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편지 어디에도 발신인의 이름은 없고, 다만 뽀르찌웅꿀라 시민이라고만 적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세 번에 걸쳐서 한 끼 나눔 운동을 후원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글씨체로 정성껏 쓴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저는 늙고, 병들고, 가난하고, 가족도 없고, 신분도 없고, 이 세상에서 낮은 곳에 있는 사람에 속합니다.” 이분은 코로나로 직장까지 잃고 어려운 생활을 하시지만, 자신을 도와주는 이로부터 받은 돈을 쪼개어서, 적지 않은 액수의 후원금을 우리에게 보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분의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모르지만, 숨어있는 성인 중에 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분은 이런 말씀도 쓰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나누지 않고 사는 사람은 있어도, 나누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입니다. 아무리 있다 해도 나누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지만, 아무리 없다 해도 나눌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겠지요! 사랑이 없다면 억만금의 재산을 갖고서도 일 원 한 푼 나누지 않고, 사랑이 있다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나누어 줍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지키라고 명령하신 사랑의 계명! 실로, 우리 주변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방금 들으신 익명의 뽀르찌웅꿀라 시민이 그렇고, 우리 성당 방역 봉사자가 그렇고, 한 끼 나눔의 후원자와 봉사자가 그렇습니다. 주님 품 안에 머물면서 봉사의 꽃도 피우고, 사랑과 기쁨의 열매도 맺으며 사는 사람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도들의 마음을 돌려놓고 위대한 사랑의 능력을 주셨듯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도 주님께서는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다.
당신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셨듯이 그렇게 서로 사랑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발도 씻어 주셨고, 친구로 대해 주셨으며,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주셨습니다. 그들의 잘못이나 결점을 나무라기보다는 있는 모습 그대로 품어 주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죄를 짓고, 결점이 있고, 크고 작은 문제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유독 다른 사람의 결점이나 잘못은 그게 아무리 작을지라도 금방 눈에 거슬리기 마련이고, 우리는 그 사람을 조건 없이 사랑하기보다는, 성급히 판단하고, 단죄하고, 미워하고, 업신여기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한 번도 그렇게 대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 바로 그 안에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더 높이 흠숭하며,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 할 수 있는 은총을 열심히 청합시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이 기적을 일으키셨네 … 알렐루야." 오늘 미사의 입당송, 시편 98장의 내용입니다. 저는 매일 아침, 사랑의 씨튼회 수녀님들의 노랫소리에 잠을 깹니다. 아침 기상 알람으로 설정해 둔 노래는 'sing a new song,' ‘새로운 노래를 불러라’이며, 가사는 바로 시편 98장입니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를, 그분께서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뜨게 되는 것도 기적이라면 기적일 것이고, 그렇게 잠에서 눈을 뜨는 순간은 새로운 하루, 새로운 노래를 주님께 불러 드릴 기회가 막 열리는 찰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루가 되었든, 십 년이 되었든, 한평생이 되었든, 예수님 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내 안에 머물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없이 어떻게 주님께 새 노래를 불러 드릴 수 있겠습니까? 1 독서에서 들은 것처럼, 예수님 없이 어떻게 바오로 사도가 극적으로 변화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없이 어떻게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 앞에서도 용감하게 설교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예수님 없이 어떻게 2 독서 말씀처럼 말과 혀끝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온전히 진리 안에서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이시며 우리는 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불러 드리려면,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게 있다면, 예수님 안에 머물면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사랑과 기쁨의 꽃을 피우고, 평화와 온유의 열매를 맺고 싶다면,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머물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머물러 주실 것이며, 예수님께서 꽃을 피우고 예수님께서 열매를 맺어주실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인 우리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영양분을 받아들이며 살면 됩니다. 열매가 열리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 수고해서 열리는 것이 아니라, 농부이신 하느님의 땀과 수고로,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열매가 열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예수님 안에 머물고 예수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문다고 하셨습니다. (요한 6, 56) 그러므로 미사와 영성체를 등한시 한다면 어찌 주님 안에 머문다 할 수 있겠습니까? 고해성사와 기도를 게을리하면서도 어떻게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에 대해서는 안 중에도 없는데, 그런데도 어찌 주님을 내 안에 모실 수가 있겠습니까?
영성적으로 더 좋고 더 많은 열매를 맺고자 한다면, 나를 위한 가지치기는 필수입니다. 그릇된 생각, 이기적 욕심, 비뚤어진 마음은 반드시 잘라내야만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깨끗하게 손질된 가지만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를 맺고자 한다면, 다시 말해 영적으로 깨어서 참되게 살고자 한다면, 무조건 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라는 참된 나무에서 떨어지게 되면, 그 가지는 떨어지는 순간부터 죽고 맙니다.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목표, 같은 정신, 같은 마음, 같은 사랑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기뻐하고 예수님과 같이 아파하는 것,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예수님처럼 활동하는 것입니다. 말과 혀끝으로만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자주 실망하고, 얼마나 많이 질리고, 얼마나 크게 절망했습니까? 우리만이라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하고, 진리 안에서 새로운 노래를 주님께 불러 드리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거꾸로 예수님과 함께 라면, 모든 것을 꿈꿀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면서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언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열매는 우리가 잘 나서 스스로 맺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2 독서 말씀처럼 언제나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만 하면 됩니다.
앞서 들은 시편 98장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강들은 손뼉 치고 산들도 함께 환호하여라.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께서 오신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환호하고, 주님 업적에 감탄하며, 주님 사랑에 불타 없어 질 수 있기를, 오늘도 주님 곁에 머물며 우리에게 놀라운 기적이 이루어지도록, 이 미사 중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