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축일은 교황 비오 11세의 1925년 교서, Quas Primas(첫째의 것)을 통해 제정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당시 유럽에서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전체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안팎에서는, 세속주의의 영향으로, 교회 권력을 비롯하여, 그리스도의 권위에도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집권하였고, 독일에서는 인종주의를 표방하며 나치당이 결성되었습니다. 이들 독재 권력은 교회의 권위에 커다란 위협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왕 대 축일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존경이 현격히 줄어들던 무렵, 그 어느때보다 필요성이 절실했던 시기에, 제정되었던 것입니다.
비오 교황님께서는 이 교서를 통해 모든 국가 및 정치 지도자들은 마땅히 그리스도께 존경을 드려야 한다고 천명하셨습니다. (Quas Primas 32) 그리고 모든 신자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 정신과 의지를 다스리고 계시는 분이 그리스도 이심을 잊지 말고, 이 대축일을 통해 힘과 용기를 내라고 격려 하셨습니다.(Quas Primas, 33.)
그리스도와 교회의 권위에 대한 불신은 오늘날에 와서 더욱 커졌습니다. 그 이유에는 극도의 개인주의가 있습니다. 자신이 따라야 할 권위는 오직 자기 자신 밖에 없는 것 처럼 살아갑니다. 합법적이고 정당한 권위 마저도 배척하고, 그저 내가 싫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제 방식으로만 행동합니다. 통치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왕이라는 호칭 자체에서도 거부감을 가집니다. 전제군주를 연상시키는 구시대적 잔재, 시대착오적인 칭호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될 것이,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왕권의 본질은 다름아닌 사랑과 겸손, 그리고 봉사라는 점입니다.
높은 자리를 탐내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민족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2-45) 그래서 오늘 우리가 기리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막강한 세력으로 압도하는 왕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으시는 사랑의 임금님,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주님, 섬김 받지 않으시고 도리어 섬기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데려오고,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고, 반대로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시면서(1독서) 당신의 양떼를 지켜주시고, 보살펴 주십니다. 하느님의 통치는 보살핌이고, 하느님의 다스림은 봉사요, 희생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왕의 직분, 이웃을 섬기는 일에 우리 모두를 초대해 주십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낮추시는 임금님, 그 신비롭고 겸손한 모습은 베들레헴 마구간에서도,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위에서도, 성체 안에서도 한결 같습니다. 그뿐 아니라,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 들 과도 오묘한 일치를 이루십니다.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 같은 일치는 불의한 이에게도, 의인의 눈에도 감추어 져 있어서, 심판 날에는 이들 모두가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헐벗고 굶주린 채 추운 거리에서 죽어가는 이들이 헤아릴 수 업이 많습니다.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보고만 계시는지, 왜 아무것도 안하고 계시는지 원망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무것도 안 하신 것이 아닙니다. 뭔가를 해오셨고,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그들을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만드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오늘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우리가 할 수 있다면, 꼭 해야만 할 것입니다.
사랑으로 비우시고, 사랑으로 낮추시고, 사랑으로 돌보시는 만민의 왕, 우리 임금님을 흠숭하며 오늘도 그 분을 닮아 나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우리 또한 더 낮아지고 더 비워내서 그리스도의 형제, 작은 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그분의 십가가곁에서, 고난받는 이웃곁에서 주님과 형제를 같이 섬기기로 약속합시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고,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말이 있다더니, 엄청난 재물을 손에 쥐고서도 땡전 한 푼 벌지 못한 사람이, 변명은 곧잘 늘어 놓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한심한 종의 이야기이자, 현실 속 우리의 못난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이 한심하고도 못난 변명을 들어 보십시오. 한사코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남 탓만 하고 있습니다.
주인은 너그럽기 그지없는 분이신 데, 거꾸로 모진 분이라고 은근히 주인을 나무랍니다. 탈렌트 한 개, 이게 원래부터도 주인의 것인데, 어처구니없게도, 자기가 무슨 선심이라도 쓰는 것 처럼 돌려줍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남들은 성실히 일해서 다들 두배로 이윤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말 해야죠.‘주인님, 제가 한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가슴을 치며 용서를 빌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그것도 변명이라고, 하는 말이 그저 가관입니다.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혹시라도 돈을 잃어버리게 되면 주인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무서워서, 지금껏 아무도 모르게 잘 감추어서 보관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보관만 했지 수익이 없습니다. 땅만 파서 묻었지, 손가락 한번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노력도 수고도 고민도 관심도 없었습니다. 남들은 벌써 저 만큼이나 앞서가고 있는데, 그 사람은 천년만년 그 모양입니다. 마냥 제자리, 도전도 없고 발전도 없습니다. 그저 이 한 몸, 내 가족의 안위만 챙겼지, 이웃을 위해, 내가 속한 교회나 사회를 위해 제대로 뭘 한번이라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디를 가든 말만 많았지 도대체가 한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그뿐 입니까? 자기뿐 아니라 남까지도 못하게 합니다.
안 하거나 못하는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대개가 남 탓이고, 불평이고, 원망입니다. 희생도 봉사도 참여도 협조도 싫으면 안 합니다. 누가 아무리 부탁을 해도, 그게 아무리 절실해도, 자기 랑은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합니다. 일생을 통해 놀랄 만치 아무것도 안 합니다. He did nothing;. 일생을 살고서도, 그냥 그게 전부였습니다. He was nothing 그의 전 생애가 결국에는 nothing 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으르고 악한 종! 주인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그 종을 내팽개치고 맙니다. 종은 어둠속에서 울며 이를 갈겠지만 영영 돌이킬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자기가 받은 탈렌트를 최대한 활용하여 더욱 풍성하게 만든 종 들은 주인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고 더 중요하고 큰 일까지도 맡게 됩니다.
탈렌트는 그리스 로마 시대에 화폐나 무게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이었지만, 영어로는 14세기, 성경 번역을 통해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15세기 부터서, 타고난 소질이나 능력을 뜻하는 단어로 자리 잡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탈렌트를 나누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아무렇 게가 아니라, 우리를 철통같이 믿으며 맡겨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재능을 주시고, 기회를 주시고, 봉사의 마음을 주시고, 연민의 마음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시는 탈렌트가 정녕 무궁무진하여 감탄하게 되고. 타고난 소질을 십분 발휘하여 과학 문명과 예술 문화를 꽃피우는 사람들을 보며 또 감탄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탈렌트 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하느님은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게 됩니다. 내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나의 재능으로 내가 주목받고, 내가 인정받고, 내가 대우받고, 내가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 거듭, 탈렌트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바오로 사도 말씀처럼 우리가 가진 것 가운데 하느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자기 것 인양 자랑할 이유도, (1코린 4, 7참조) 작다고 해서 실망할 이유도 없습니다. 내게 맡겨진 탈렌트 가 크든 작든, 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먼저 거기 담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맡겨진 탈렌트는 하느님의 영광과 그 나라를 위해 써야 하는 선물이자 소중한 보물이며, 그 정도의 무게 만큼이나, 내가 지고 가야 할 책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나에게 맡겨진 탈렌트를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잘 활용하거나, 혹은 그릇된 욕망에서 잘 못 쓰거나, 혹은 그대로 묻어 두고 삽니다. 나는 용기가 없어서, 두려워서, 누구 누구 때문에, 아직은 시간이 이르러서, 내 말고도 더 잘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렇게, 내가 지금 하지 않는 이유, 아니, 평생 내가 못하는 이유를 붙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탤런트를 주실 때 일체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으셨을 주님을 생각합시다. 여러분, 특히 어떤 것들은, 오직 남들을 위해 쓰라고 받았다는 생각이 진짜 들지 않습니까? 두려움은 버리고, 아낌없이 쓰고, 남김 없이 씁시다. 더 이상 감추지 말고 드러내 주십시오. 묻어두지 맙시다. 그리고 아낌없이 내어 주신 주님만 바라봅시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풍부한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열명의 처녀는 말할 것도 없이 교회를 상징합니다. 혼인 잔치를 목전에 두고, 한껏 들뜬 마음으로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처럼, 교회는 신랑이신 주님께 모든 희망을 두고 그 분을 기다리는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입니다. 박해가 사라진 오늘날과는 달리, 신앙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어야만 했던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는, 주님의 재림 만큼이나 더 절실한 소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다리던 주님의 재림이 자꾸만 늦어지자, 처음에 품었던 열망도 시들 해지고, 긴장감도 느슨해져 갔습니다. 기다림에 지치고 정신마저 해이해져 깜빡 잠이 들고 만 처녀들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잠든 것 자체는 별로 문젯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도 어리석은 처녀도 똑같이 잠들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등만 갖고 있었지, 기름은 다 소진되어 더는 없었다는 점입니다.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세상의 빛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이 훤히 드러나 있듯이, 등불은 켜서 등경 위에 놓아야만 주위를 비추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 하십니다.(마태 5,14-16 참조).
그런데 빛을 밝히려면 등만 있어서는 안되고 기름도 함께 있어야 합니다. 기름으로 불꽃이 타올라야만 신랑의 모습도 알아보게 되고, 그 분의 앞 길도 비출 수가 있게 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당한 사람을 돌보면서 상처에 기름을 부어 줍니다.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드리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렸습니다. 메시아, 구원자를 뜻하는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기름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의미하기도 하고, 동시에 개별적이면서도 친밀한 그분과의 관계를 나타내 주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에겐 그같은 기름이 메말라 버렸습니다. 이제 와서 남에게 빌리기도, 어디 가서 살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남이 대신 해 줄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내 혼자 힘으로 해내야만 하고, 이 번을 놓치게 되면 두 번 다시 그런 기회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의 죽음을 남에게 떠 넘기지 못하는 것처럼, 내가 받을 심판도 어쩔 수 없이 나 홀로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믿음도 회개도 하느님과 이웃에 용서를 비는 일도, 남이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처녀들이 아무리 다급하게 기름을 얻고자 해도 단번에 거절당하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신랑으로 부터는 뜻밖의 외면을 당하고,“너희를 알지 못한다”라는 충격적인 말까지도 듣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구원의 선물을 놓치게 되고, 잔칫집 문은 닫히고 맙니다.
앞서 말한대로, 어리석은 처녀들의 잘못은 깜빡 잠 든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근본적인 잘못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받은 등을 올바로 관리하지 않았습니다. 무늬만 신자였지, 착한 행실로 주위에 빛을 밝히며 살지를 못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그저 건성으로만 다닐 뿐, 하느님을 내 모든 것의 주님으로서 충심으로 받들고 따랐던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대면할 준비가 당장 있을리 만무합니다. 어느 누구도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는데, 우리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면, 이를 어찌 어리석다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찌 이를 한심하다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신앙의 아름다운 등, 거기에다 향기로운 우리 선행의 기름을 채워서, 이제부터는 따뜻한 사랑의 등불, 밝게 빛나는 희망의 등불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어디에 쓰이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기름이 말라 붙어, 더 이상 주위를 밝힐 수 없게 된다면, 그런 신앙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한밤중 깜깜한 어둠을 뚫고 날아오는 소리가 어느 날 우리를 깨우게 될 것입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듯이, 그날은 반드시 도래하고, 신랑은 마침내 오십니다. 그날을 위해 우리가 받은 등을 감추거나 방치해 두지 말고, 손에서 절대 놓지 않고 날마다 정성껏 불을 밝힙시다. 그 날에는 우리 모두 주님의 길을 밝게 비추어 그분을 환영하고, 그날에는 감격과 환희의 눈물로 서로의 기쁨을 나눕시다.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주님의 나라를 우리 모두 차지 할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며, 오늘도 정성을 다해 기도 드립시다.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질문합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이 질문은 613 조항이나 되는 그 많은 율법 중에서 과연 어떤 것이 으뜸으로 중요한 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또한 모든 율법을 하나로 요약해 주는 핵심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장 5절을 인용하시면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야 말로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약에 대한 충실함(New Jerome Commentary)을 의미합니다. 애정이나 호감은 주로 감정에 의해 좌우되지만 계명으로서의 이 사랑은 의지와 실천의 문제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아침 저녁으로 바치는 기도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대대로 유대 신앙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둘째도 이와 같다고 하시며 이웃 사랑에 대한 성경 구절을 인용 하십니다.“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의 이 말씀을 하느님 사랑에 이어 또 하나의 중심 계명으로 꼽으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이러한 견해가 당시 율법 교사들에게 특별히 생소하거나 유별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탈출기의 말씀처럼 이웃 사랑 또한 분명히 구약 성경의 주요 가르침 중의 하나입니다.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되며, 고아와 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자를 염려하고 배려하는 하느님의 마음이 여기 이 말씀 속에도 진하게 녹아 있습니다.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다면, 해가 지기 전에는 돌려주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가 덮을 것이라고는 그것뿐이고,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 겉옷뿐이기 때문입니다.
얼핏 보아선, 예수님의 답변이 남다르게 독창적이거나 전적으로 획기적인 것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루카 10, 25-28참조),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의 두 계명이야 말로 율법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는 핵심이며, 오직 이 사랑의 두 계명을 통해서만 비로소 율법 전체를 이해 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 속에서 온전히 드러난 이 사랑은 율법을 뛰어 넘었고, 죽음 마저도 이겨 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랑의 계명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합니다. 내가 하느님을 진짜 사랑하는지 어쩐 지를 알고 싶다면 이웃과의 관계를 떠올리면 됩니다. 내가 지금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면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요한 1서의 말씀 처럼,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4,20)
이 두번째 계명. 이웃에 대한 사랑 또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의 확고한 결심이자 변함 없는 실천을 의미합니다. 역설적 사랑이라는 제목의 시에는 이런 구절들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다. 그래도 사랑해라. Love them, anyway. 당신이 하는 선행이 내일이면 잊혀질 것이다. 그래도 선행을 하라. Do good, anyway.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 받을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Be honest and frank, anyway.(Kent Keith).
우리는 각자가 지니고 있는 크고 작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한없이 너그럽고 또한 끝도 없이 스스로를 아낄 줄 압니다. 그렇듯 이웃도 나 자신처럼 대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느님께서는 가르치십니다. 아니, 명령하십니다. 내가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하듯이, 그만큼 이웃도 보살피고 인정해 줄 줄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그렇게 우리 또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민자, 망명자, 서류 미비자, 마약 중독자, 실업자, 홈리스, 장애자 등은 우리가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할 이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한 가지 방법, 이웃 사랑이라는 유일한 통로를 통해서, 우리는 마침내 하느님을 올바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이신 분이시기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기꺼운 응답으로써 주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사랑이 실천적인 사랑이 될 수 있도록 미사 중에 다시 한번 새로운 결심을 다집시다.
나쁜 목적으로 서로 어울리는 것을 두고 야합이라고 말합니다. 전에는 원수처럼 지냈던 빌다도와 헤로데가, 예수님께서 처형되시던 바로 그날에는 친구가 되었다는 성경 구절처럼(루가 11, 12), 평소에는 서로 달갑게 여기지 않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오늘은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서로 야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유대 율법 준수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큰 자부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바리사이 들이었습니다. 율법에서는 오직 한 분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주님이시며, 통치자이기에, 아무리 로마 황제라 할지라도 유대인을 지배할 권한은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일은 신성모독으로 여겼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헤로데 당원들은, 그 이름이 말해 주듯이, 유대 왕 헤로데를 따랐고, 로마의 지배를 지지 하였습니다. 로마를 지지하면 이득이 따르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 뿐 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이 둘은 오늘 모리배처럼 서로 야합을 하여, 지극히 간교하게 예수님을 올가미로 유인합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게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견해를 같이 해서, 로마가 세금을 거두어 갈 권한이 없다고 대답하게 되면,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 의해 포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헤로데 당원의 입장에 서서, 로마의 합당한 권한을 인정하게 되면,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 찍히게 될 것입니다. 진퇴양난, 절체절명의 궁지로 몰린 듯 보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적들 마저도 경탄할 정도로(마태 22, 35) 태연하고도 지혜롭게 위기를 벗어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게 한 다음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인지 물으십니다. 황제(티베리우스)의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오자,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악의를 품은 사람들의 손에서 놀라우리 마치 슬기롭게 빠져 나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닌 지극히 중요하고도 궁극적 문제에 눈을 돌리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것을 다시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일 말입니다.
동전에 새겨져 있는 황제의 초상(image), 바로 그 초상 때문에, 동전은 황제에게 속하고, 또 황제에게 돌려줘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것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삼라만상 그 모든 것 중에, 하느님께 속하지 않은 것이 없겠으나, 특별히 우리 인간이야 말로 오롯이 하느님께 속하고, 오직 그분의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전에 황제가 그려져 있듯이,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동전이 황제에게 속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께 속합니다. 세금을 내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고 당연한 일 이듯이,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일 또한, 그지없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내 온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줄을 절대 모르지는 않으나, 여전히 서로에 대한 미움과 증오, 편견과 불신, 배척과 학대가 없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 되었다는 그 엄청난 사실을 너무나 자주 잊어 버리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나 자신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 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면, 미운 마음을 지니고서도, 마치 아무 일도 없는 양 그렇게 살아 갈 수는 없게 됩니다. 남들 또한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남들에 대해 그 어떤 것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는 완벽한 하느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면 닮아 갈수록, 더 뚜렷이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게 됩니다. 내 안에서도, 그리고 내 이웃 안에서도 말입니다.”(William J Grimm)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오늘 미사에서 더욱 합당한 마음과 더욱 정성된 기도로써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돌려 드립시다. 우리의 모든 것이 본래부터 하느님의 것이었음을 깨닫고, 일생동안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께 바쳐 드릴 수 있는 은총을 빕시다.
손님도 주인도 모두가 흥겨운 혼인 잔치, 화사하게 꾸며 놓은 잔치상마다 잘 익은 술과 푸짐한 음식이 가득합니다. 시끌벅적 맘껏 웃고, 춤 추고, 노래하느라 다들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잔칫집!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설명하시면서, 성대한 잔치, 임금님이 베푸는 아들의 혼인잔치에 비유하십니다.
왕자의 결혼은 나라의 큰 경사이므로, 임금님은 손님들을 초대해서 큰 잔치를 베풉니다. 이렇듯 하느님 나라는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서 친히 베풀어 주시는 잔치 한마당, 그분의 구원으로 인해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하느님의 왕국입니다. 거기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실 것” (1독서)이며, 이제 더 이상,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입니다.”(묵시 21,4)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첫 번째 단어는 바로 이것입니다. 기쁨! 슬퍼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은 결코 슬퍼해서는 안됩니다. 절대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몫은 기쁨입니다. 이는 재산이 많아서 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에서 비로소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생겨나는 기쁨입니다.” (Pope Francis, The Church of Mercy)
그리고 그 기쁨의 정점에는 성체 성사가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자 정점입니다.”(교회헌장 11항) 영성체를 통해 우리는 현세에서도 예수님과 일치할 수 있게 됩니다. 성체 성사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우리 모두를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 생명의 양식을 같이 나누어 먹고 마시면서, 천상의 잔치를 맛보게 되고, 거기에 미리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총에는, 그 외에도 끝이 없습니다.
물과 공기, 가족과 친구, 시각과 미각, 사랑의 기쁨과 행복한 마음, 시간과 계절, 생명과 건강, 별빛과 모닥불, 이 모두가 그저 신기할 따름인데, 더 놀라운 건 그 모든 것이 무상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자격이나 무슨 권한이 있어서 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만큼, 우리 각자에게 거저 내려 주십니다. 물론, 구원의 선물인 영원한 생명까지도 말입니다.
미사는 이 모든 은총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제사입니다. 또한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을 기념하고,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하느님 백성의 잔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손수 상을 차려 주시는 잔치에 귀한 초대를 받고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는 않는지요? 기도와 감사보다는 유흥과 돈벌이가, 찬미와 나눔 보다는 늦잠과 여행이, 하느님과 교회 보다는 나 자신과 가족, 친구가 언제나 더 중요하지는 않았 던지요? 비유에서, 초대받은 사람들의 무례하고도 사뭇 불손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임금님은 잔치를 전격 취소하지 않고, 갑남을녀, 모든 사람에게로 초대를 확대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인 손님 가운데에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었는데, 결국 그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쫓겨나고 맙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혼인 예복을 “순수한 마음과 깨끗한 양심, 진실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라고 풀이했습니다. 다시 말해 혼인 예복은 “하느님의 자유롭고 무상으로 베푸시는 초대에 대해, 그와 마찬가지로 자유롭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우리의 응대”(Tim McGeorge)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발적 선행으로 열매 맺는 회개의 삶입니다. 죄인도 잔치에 초대는 되지만, 먼저 회개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미사에 우리는 어떤 예복을 입고 왔습니까?
한 때는 교회와 그리스도를 박해했던 큰 죄인이었으나, 회개를 통해 새로 태어난 바오로 사도는 2독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어떤 궁핍과 환난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잘 견뎌낼 수 있었던 비결이 그리스도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 에게도 우리 에게도 갖추어 입어야 할 웃은 “빛의 갑옷,”그리스도 입니다.
부르심을 받고서도 끝내 선택되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새로운 결심과 함께, 우리가 영하는 주님의 몸과 피가 우리를 위해 마련해 두신 영원한 천상 잔치에로 이끌어 주시기를 오늘도 열심히 기도 드립시다.
방금 우리는 포도밭에 관한 두가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 독서에서 포도밭은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포도원 주인은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라며, 땅을 일구고, 좋은 포도나무를 정성껏 심습니다. 거기다 탑도 세우고 확도 만들었지만, 그 수고는 그대로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어찌하여 들포도를 맺었느냐?” 포도원 주인의 탄식 속에는 안타까움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습니다. 도대체,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이는 당신이 뽑으신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탄식입니다. 공정과 정의를 바랐건만, 피 흘림이 웬 말이고, 울부짖음이 웬 말이냐?
복음의 비유에서도 포도밭은 하느님의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포도밭 소작인은 백성을 돌볼 권한과 책임을 위임 받은 지도자들, 곧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용하였고, 하느님의 뜻 마저도 저버렸습니다. 예언자들이 아무리 회개를 부르짖어도, 그들은 돌아 서지 않았고, 하느님께서 친히 성자를 보내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상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죽이는데 그치지 않고, 급기야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마저도 살해하고 맙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잃어버리게 되고, 새로운 민족들이 그 자리를 차지 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청중, 그러니까,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보인 반응은, 오늘 우리가 눈 여겨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의 모습 속에도 분명, 그들과 닮은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소작인들 이야말로 진짜 나쁜 놈 들이란 걸 대번에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그 악한 자들이, 다름아닌 바로 자기 자신들이란 것을, 그들은 끝내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도 않았고, 당연히 뉘우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못마땅해 하고 예수님을 붙잡으려 듭니다. 우리 또한 작은 질책 하나 에도, 진심 어린 충고 하나 에도 잘 참지 못하고, 반성은 커녕 무턱대고 상대방부터 공격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게 거듭 회개의 기회를 놓치게 되고, 그렇게 점점 하느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소작인들 이야말로, 진짜 나쁜 인간이라는 것을 여기에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소작인들의 비도덕적인 행태 속에 혹시 우리 각자의 모습도 보이지 않던 지요? 그들은 주인께 소출을 돌려 드리지도 않았었고, 주인의 것을 통째로 가로채고자 했습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1 코린 4, 7)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받은 그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하느님께 얼마만큼 감사하고 있으며, 또 얼마만큼 돌려 드리고 있는지요? 하느님이야 말로 내 삶의 주인임을, 하느님이야 말로 내 가족의 주인임을, 하느님이야 말로 우리 공동체의 주인임을, 우리가 얼마나 자주 잊었었고, 아니, 우리가 얼마나 하찮게 여겼었고, 또, 얼마나 강하게 거부해 왔는지요?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일꾼이고, 온 세상이 바로 하느님의 포도밭입니다. 우리가 전해주는 하느님의 말씀과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 우리 이웃 중 한 사람이라도 더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한사람, 한사람을, 앞에서 끌어 주고 뒤에서 밀어줘야 할 것입니다. 찬미와 감사, 봉사와 나눔은 우리가 날마다 하느님께 바쳐야 할 소출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여기 모인 우리 일꾼들을 전례 말씀을 통해 훈계하시기도 하고, 같은 말씀과 영성체로 힘을 북돋아 주시기도 합니다. 잘못은 고치고 축복은 나누어서, 오늘 2 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참되고 고귀하고 의롭고 정결하고 사랑스럽고 영예로운 일을 오늘도 이어 나갑시다.
오늘 복음은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오늘 포도밭에서 일 좀 해라고 말합니다. 맏아들은“싫습니다”라고, 쌀쌀맞게 대답했지만, 나중에는 마음을 바꾸어 일하러 갔습니다. 반대로 둘째 아들은 “네, 아버지!”하고 깍듯하게 대답은 했지만, 정작 일하러는 가지 않았습니다.
이 비유에서 대답만 멀쩡했지 행동이 따르지 않았던 그 둘째 아들은 종종 예수님의 권한에 문제를 삼았던 수석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올바른 것을 말하고 가르쳤지만, 표리부동, 실상, 말만 번지르르 했지, 둘째 아들처럼, 속빈 강정에 불과 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세리와 창녀들 보다도 더 형편없었는데, 왜냐하면 이런 죄인들 마저도 결국은 뉘우치고 복음을 믿었지만, 수석사제와 원로들은 “그것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고, “끝내” 믿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과 행동이 사뭇 다르거나 혹은 그저 말 뿐인 경우를 우리 자신의 모습속에서도 자주 발견하곤 합니다. “네, 아버지!”라고 대답했던 둘째 아들처럼, 우리도 주일미사와 고해성사를 통해 나름대로 충실히 응답을 드리고 있습니다. 미사나 기도를 통해, 보다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도 하고 약속도 드립니다. 하지만, 그러고도 구체적인 행동이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다면, 이런 다짐과 약속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행동 없는 믿음, 천번만번 결심만 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언제 어느때라도 달려 나가, 아무리 힘들어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일, 그 일은 교회 안이든 밖이든,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오늘 제 2독서의 말씀 처럼, 정녕, “자기 것만이 아니라 남의 것도 돌보아 주는 일일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이기심이나 허영심이 아닌 겸손한 마음, 성인 성녀들의 삶이 한결같이 보여주듯이 겸손은 모든 덕의 기초이자 뿌리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겸손이야 말로 모든 지혜의 정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겸손을 얻기 위해 이런 기도를 바쳤습니다.
Noverim me, noverim te, 나를 알게 해 주소서, 당신을 알게 해 주소서, 제가 겸손 할 수 있도록 저를 알게 해 주시고,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당신을 알게 해 주소서.(Soliloquies, 1.1,3)
그렇습니다. 하느님 앞에 서 있는 나를 알면 알수록 더 겸손 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당신 자신을 비우시는 하느님을 알면 알수록 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겸손한 마음은 하느님을 깨닫게 해주고 그 분을 닮게 해 줍니다.
한편 세상에는 하느님을 믿지도 않고, 교회에 다니지도 않는데, 우리 보다 더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생 기도 한번 하지 않았고, 성경 한 줄 읽어 본 적도 없지만,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오손도손 인정을 나누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매주일 신앙고백도, 영성체도, 예물 봉헌도 하지 않지만, 분명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는, 하느님의 사람들, 이른바, 익명의 그리스도인 입니다. 물론 그들 자신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불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길지라도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우리 보다도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직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지금도 이기심과 허영심에 빠져 있다면 말입니다.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라고 오늘도 불러 주십니다. “네, 우리 주님!”그럴게 기쁘게 대답하고, 서둘러 주님 포도밭으로 달려 갑시다.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우리도 예수님 처럼, 그렇게 오늘 하루도, 나를 비우고 남을 돌보는 일을 함께 엮어 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