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 5 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교황님께서는 특별 담화문을 내셨는 데, “사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를 제목으로 뽑으셨습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은 우리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형제이고 자매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잃어버린 존엄성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만 말고, 그들이 있는 집으로, 병원으로, 거리로, 보호소로 찾아 가는 것이 급선무라고도 하셨습니다.
담화문에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글이 담겨져 있습니다. 내용 그대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마십시오. 그가 세상에서 둘도 없는 악인일지라도, 그에게 먹을 것이 없으면, 굶주림에서 구해 주십시오. 바닷가의 항구는, 선인이나 악인이나, 누구든 상관없이 쉴 수 있는 피난처입니다. 가난이라는 난파에 시달리는 사람을 보거든, 그 사람을 판단하지도 말고, 그 사람의 행실에 대해 이것 저것 따지지도 말고, 여러분이 든든한 항구가 되어 말없이 그를 구해 주십시오.”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고,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고, 오직 구해 주라는 그 말씀을 저는 마음 속 깊이 새기기로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극빈자 그 중에서도 노숙인의 경우, 그 목숨 이란 게 너무나 위태롭고, 그 삶이 너무나 비참하기 때문입니다. 굶기를 밥 먹듯 하고, 그 흔한 양말도 신발도 속옷 한 장도 없이, 차가운 길 바닥에서 지내는 사람들의 처지가 너무나 딱합니다. 그러니, 당장은 사람부터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부자는 죽어서 고통을 받고, 라자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에게서 위로를 받습니다. 부자는 자기 이웃을 모른 척 했기에 지옥에 갑니다. 그런데 라자로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천국에 갔을까요?
쉽게 말하면 예수님 빽 때문입니다. 요즘 갑자기 유명해진 말, 깐부! 가난한 사람은 예수님의 깐부입니다. 깐부라는 말이 어쩌면 영어 단어 camp 에서 왔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의 유래가 어떻든 간에, 예수님은 실제로 그들과 움막을 같이 쓰는 분, 같은 탠트 안에 계신 분, 그들의 형제며, 친구입니다.
그들의 기막힌 처지도, 그들의 끔찍한 고통도, 그들의 기구한 운명까지도 예수님께서는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영광에 싸여 오셔서, 옥좌에 좌정하실 때, 일일이 모든 이를 심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 이 말씀은 가난한 자들은 물론이고, 그들과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얼핏 봐서는 종말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핵심 내용은 정반대로 위로와 희망입니다. 태양이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어도, 예수님께서는 떠나지 않고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큰 권능과 영광, 눈 부신 사랑의 빛으로 우리를 비추실 것입니다. 하늘과 땅,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사라질지라도 그 분은 영원히 계시고, 세상의 모든 일이 결국은 다 지나갈 지라도, 그분의 말씀은 단 한마디도 빠짐없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어떤 형태일지 우리는 자세히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느님께서 손수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그 모든 것을 새롭게 완성하실 분도 하느님 이시라는 점을,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재림 날짜는 물론이고, 우리가 언제 죽는 지도 잘 모릅니다. 우리 각자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일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우리는 살아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싫든 좋든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가 없고,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결국은 예수님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는, 오늘 제 1 독서 말씀 처럼,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영원한 치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이 언제 일지 모르기에, 주님께서는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날, 그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혹은 어느 장소, 파라다이스가 중요한 게 아니라, 주님과 만나게 된 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이 주님과의 만남에 있습니다. 살아서도 그렇고, 죽어서도 그렇고 모든 인생은 하느님과의 만남이 그 목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만남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말씀과 올바른 양심, 그리고 성체 안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예수님 과의 만남이 언제나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지도 않은 때, 부지불식간의 뜻밖의 장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얼굴을 봅니다. 가난한 이들의 고통 속에서, 그들의 비인간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기난한 이들의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서 함께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며 오늘도 우리의 작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은총의 날이 될 수 있도록, 미사 중에 정성껏 기도드립시다.
우리 주위에는 정말이지 진실한 사람이 있습니다. 흔히들 진국 같은 사람이라고 말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매사,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정성을 기울입니다. 말과 행동에 있어서 가식이 없고, 일체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겸손하고 언제나 착합니다.
반대로 어디를 가든 천대받는 천덕꾸러기가 있습니다. 공자님 마저도 미워 하셨는 데, 이런 사람들입니다. 험담하는 사람, 윗사람을 비방하는 사람, 용감하지만 예의가 없는 사람, 자신이 공손하지 못한 것을 오히려 용맹으로 착각하는 사람, 남의 허물을 들추어 내는 것을 무슨 정의라도 되는 걸로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논어 양화편 26장) 공자님께서는 2500년 전의 사람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미움 받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때도 지금도, 공자님의 눈에도 우리의 눈에도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도 꼴불견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 그들은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 잔칫상에선 윗자리를 즐겼습니다.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고 살면서도, 남에게 잘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모셨던 사람이 아니라, 반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느님을 이용했던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파수꾼, 율법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던 사람들, 예나 지금이나 이들에게는 언제나 하느님의 준엄한 질책이 따라다녔고, 이들 앞에는 엄중한 단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도에도 꼴불견이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의 기도, 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고 가증스럽습니까? “하느님, 제가 강도나 간음하는 자,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감사합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잔뜩 오만해져서 기도할 때도 고개는 빳빳이 쳐 들고 있습니다. 누가 저걸 두고 참된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누가 저걸 두고 참된 감사라고 하겠습니다. 누가 저걸 두고 참된 십일조, 참된 봉헌이라고 하겠습니까? 반면에 진실한 기도가 있습니다. 바로 세리의 기도가 그렇습니다. 세리는 하늘을 향하여 얼굴도 제대로 못 듭니다. 그리고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자선에도, 십일조에도, 교무금에도, 주일 봉헌에도 거기에는 품격이 있습니다. 헌금의 품격은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헌금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헌금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 보십니다. 그들이 손에 쥐고 있는 돈도 돈이지만, 헌금하는 태도나 몸 가짐을 더 유심히 보셨을 것입니다. 보란 듯이, 자랑이라도 하듯이 큰 돈을 넣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동전 한 닢도 아까워 하면서 내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보잘 것 없이 작은 액수였지만, 그 과부는 가진 것 전부, 생활비 모두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먹을 것도 없는 데 어떻게 그 돈을 다 넣을 수 있었을까요? 그 과부는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있었고, 하느님께 감사한 마음이 있어서 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것에 비하면 지금 내가 드리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 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부를 드리면서도, 하느님께 너무나 죄송한 마음으로 헌금을 했을 것입니다. 당장 오늘 저녁은 굶어도 하느님께 뭔가를 드릴 수 있어서 너무 기뻤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요? 율법학자는 자신들이 사람들로부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고, 또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이용하고 과부를 속여서 자기 뱃속을 불리고도, 반성은 커녕 다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을 압니다. 그러니 감사의 마음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그 과부입니다. 가난한 그 과부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지만 하느님은 보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 나의 시간, 나의 마음, 나의 지식, 나의 재능, 나의 열정을 하느님께 바쳐 드리면 좋겠습니다.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별 것 아닌 것 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느님께서는 다르게 보실 것입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가난한 형제 자매를 위해, 한 분이신 하느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오롯이 바쳐 드릴 수 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구합시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질문하자, 예수님께서는 주저없이 수많은 계명 중에서 딱 두 개 만을 뽑습니다. 첫 번째 계명은 단연코 하느님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 4-5)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그것도 남김없이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과 시간, 가족과 친구를 주셨습니다. 창조적으로 일하고, 신나게 놀 줄도 아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과일과 꽃, 맑은 공기와 파란 하늘, 실로, 우리 안팎을 선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이것만 해도 이미 차고 넘치는 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까지도 사랑 때문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으로 되갚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경외하며,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일, 그 외에 무슨 일을 또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리저리 너무 바빠서, 매순간 찬미 드리지 못하고, 매일 매일 감사드리지 못한 다면, 그렇다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딱 주일 하루 만이라도, 아니 미사 시간, 딱 한 시간만이라도, 온 마음을 다하고, 온 정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 계명은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 18) 예수님께서는 율법서에서 각기 떨어져 있던 두 개의 계명,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하나로 묶어 주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아무리 떼려고 해도 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합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웃에게 해 준 모든 사랑은 자신이 알고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 결국은 하느님에게 해 준 사랑이 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율법서에서 두 개의 계명을 하나로 묶어 주셨는데, 최후의 만찬 때에는 보다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서로 사랑하되, “내가 사랑한 것처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비발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보면 그 중에서도, 가장 심금을 울리는 아리아, Amami Alfredo 가 나옵니다. 여주인공 비올레타가 떠나면서 부르는 노래 입니다. “Love me, Alfredo.” 내가 사랑한 것처럼, 나를 사랑해 주세요. 만약에 사랑에 공식이 있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는 이렇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므로, 너도 나를 사랑해야만 돼! 그러나 하느님과 사람 사이는 다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므로, 너는 이웃을 사랑 해야만해!”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보답을 원치 않으시고, 대신 이웃에게 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에 사랑을 베풀되, 우리 사랑에 보답 할 수 없는,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라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가난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지닌 배경, 집안, 재산, 직업, 학력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지니는, 가장 근본적인 존엄성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행위입니다.
둘째, 가난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용서를 청하는 행위입니다. 그들 앞에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늘 거리를 두었던 점,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를 보면서도 그저 모른 척 살아왔던 점,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에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행위입니다.
세번쩨로, 가난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을 말 로써만, 마음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보살피고 도와 주는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서 말씀 처럼, 굶주리고 헐벗은 이에게 “평안히 몸을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야고 2, 16)라고 백 번, 천 번,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실 리가 절대 없습니다. “내가 헐벗었을 때, 너가 나를 마음으로 불쌍히 여겨 주어서 고맙다.”우리 모두는 그 말씀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다.”
이렇듯 사랑의 두가지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는 이 두 계명을 통해서, 사랑, 다시 말해 하느님의 본성 그 자체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우리 또한 신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놀랍고 새로운 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이에 온마음으로 하느님께 감사하는 하루가 될 수 있도록, 이 미사 중에 정성껏 기도를 드립시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예리코의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절박한 심정으로 그렇게 외쳤습니다. 여기서“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메시아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놀랍게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지를 아는, 그런 혜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정체를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성경이 전하듯이, 심지어 마귀도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인 줄 알고 있었고, 심지어 눈먼 거지도 메시아 인 줄 알고 있는 데, 밤낮 예수님과 함께 하는 제자들은 정작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똑 같은 질문을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하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영화를 꿈꾸며, 하나는 주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었고, 그래서인지 청하는 내용도 올바르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바르티매오는 올바른 것, 바람직한 것을 청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때 예수님께서는 어떤 특별한 기적의 행위를 따로 보여주시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만 말씀해 주십니다. 다시 말해, 바르티매오는 자신의 믿음을 통해 스스로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순간 부터, 이미 바르티매오는 영적으로 눈이 열려져 있었으며, 이러한 내면의 통찰력, 신앙의 눈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르티매오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던 것처럼, 미사에 나오는 우리에게도 이와 똑 같은 구원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매번 미사에 나오면서도 왜 우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는 걸까요? 왜 우리 마음은 시간이 가도 치유되지 않고, 왜 우리 신앙은 세월이 가도 성장하지 않을까요? 왜 오늘도 성당에 별 생각없이 왔다가, 왜 오늘도 빈손으로 돌아가는 걸까요?
세상이 주는 행복과 즐거움이 너무 크고, 거기에 따른 애착과 욕심이 너무 커서입니다. 하느님을 향해야 할 우리 눈이 언제나 엉뚱한 데로 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서의 하느님의 현존도, 우리 가운데서의 하느님의 나라도,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그분의 선하신 일도, 우리 눈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그런 것을 보려는 마음이 우리에게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보고 싶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아서 우리의 두 눈을 감아 버리고, 두 귀를 틀어 막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기도 드립시다. 예수님, 저희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구원은 의외로 단순하게 이루어 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신학,성경, 철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필요하지도 않고, 매 순간 불 같은 열성으로 활활 타올라야만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주님을 알아보는 눈만 있으면 됩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걸어가시는 길, 그 곁에 머물러 있다가, 우리의 바람, 희망, 걱정거리를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면 되는 것 같습니다. 바르티메오는 그 당시의 눈으로 보면,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장애를 얻은 것이고,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으며, 구걸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자비를 입어, 죄를 용서받았고,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으로 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는 목이 터져라 외쳐 댔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당장 겉옷을 벗도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이제 예수님은 바르티메오가 머무는 집이 되었고, 그분의 길은 바르티메오가 걸어야 할 길이 되었습니다.
일단 예수님을 알고 나면, 그때부터 그분의 길은 바로 우리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길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그렇게 죽음을 넘어서 부활과 영원한 생명 까지도 모두 우리의 행선지가 됩니다. 오늘 우리 눈이 열려,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우리 또한 변화되어 주님의 뒤를 기쁘게 따를 수 있는 은총을 이 미사 중에 간절히 청합시다.
지난 목요일과 토요일에는 그레고리오 성당의 히야친타 쌜 회원들이 한 끼 나눔을 위해 햄버거 포장 봉사를 해 주셨습니다. 햄버거와 과일 그리고 음료수를 300명에게 나눠 드리려면, 대략 750불 정도 드는 데, 고맙게도 전액을 도네이션 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 봉헌도 많이 해 주셔서, 지금까지 우리 교우들과 파티마 세계 사도직을 합치면 묵주기도만 25만단이 넘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도 결국은 나눔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부자는 울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진 것을 나누며 사는 사람도 의외로 많습니다. 이들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사람들이며, 인생을 기쁘게 제대로 살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혜에 비한다면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오늘 지혜서는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기에, 우리는 그 지혜를 얻기 위해서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기도하자 나에게 예지가 주어지고, 간청을 올리자 지혜의 영이 나에게 왔다.” 교회는 10월 한 달을 묵주기도 성월로 정하고, 개인과 가정의 성화, 나아가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 하라고 가르칩니다. 묵주기도는 예로부터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많이 바치는 기도이자 가장 사랑하는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께 바치는 관상기도 입니다. 성모님의 시선으로, 성모님의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우러러 보는 것, 그것이 교회가 설명하는 묵주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를 잘 바치기 위해서는 성모님을 모셔와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체, 성모님과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씀 하셨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 제자는, 단순히 요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제자를 일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어머니를 주셨고, 어머니께는 우리 모두를 자녀로 안겨 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이러한 관계를 선포만 하신 게 아니라, 실제로 제정해 주셨습니다. 성체성사처럼“이는 내 몸이다”라고 할 때 실제로 성체로 변화 되는 것 처럼 말입니다. 성모님과 우리의 관계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입니다. 성모님이나 우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 제자는 성모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우리 또한 그 제자처럼 성모님을 우리 삶으로 모셔와야 합니다. 성모님을 모셔 온다는 것은 성모님을 통해, 성모님과 함께, 성모님 안에서, 그리고 성모님을 위해서 예수님과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묵주기도의 목적도 바로 이것입니다. 성모님을 통해, 성모님과 함께, 성모님 안에서, 성모님을 위하여, 우리가 예수님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 속에서 성모님의 공간을 더 많이 내어 드리도록 노력합시다.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더 많이 하고,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를 정성껏 드리면 좋겠습니다. 죄인의 회개를 위해서, 냉담자를 위해서, 비신자를 위해서,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세계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일할 수 있도록 성모님의 전구를 청합시다.
복음의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슬퍼 하며 떠났습니다. 왜냐하면 재산을 팔아서 나누어 줄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에서는 아무도 슬퍼하며 떠나는 사람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재산을 다 팔 수야 없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작은 나눔이라도 실천하겠다는 결심을 하면 좋겠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꾸준히 기도 하겠다는 결심을 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결심이 실천으로 이어 질 수 있도록, 이 미사 중에 성모님의 도우심을 구합시다.
지난 월요일에는 교구 전체 사제모임이 있어서, 다운타운에 있는 대성당에 가게 되었습니다. 지난 2월 이후로 매주 목요일마다 다운타운에 다녀오지만, 정작 대성당은 올해 들어 처음이었습니다. 저처럼 올해 들어 한 번도 대성당에 가보지 않으셨다면, 일부러 시간 내서 꼭 한번 다시 가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지난 1월 1일 이후로 제대 뒤쪽으로 중앙 벽면에 대형 작품이 새로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융단에 실 같은 것으로 그림을 새겨 넣은 것을 테피스트리 라고 하던데요, 5폭의 융단에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그 중앙에 성모님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분명 처음 보는 그림인데, 그런데도 이상하리 만치 낯설지가 않고, 마치도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화룡점정이 바로 이런 거겠죠? 요즘은 신의 한수라고 하던데,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으로 인해 대성당의 다른 모든 작품이 마침내 하나로 연결되고 완성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좋은 부부의 모습이 이런 것이 아닐까요? 남남으로 만나서 결혼 했지만, 마치 오래 전부터 함께 했던 것처럼, 오누이나 친구 같은 부부가 있습니다. 백년해로 하면서 내 배우자야 말로, 내 일생 최대의 행운이고, 내 인생의 화룡점정이고, 서로를 위한 신의 한 수라고 여기는 부부도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와는 정반대의 경우를 더 많이 보게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신명기 24장 1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어떤 남자가 여자를 맞아들여 혼인하였는데,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 증서를 써서 손에 쥐어 주고 자기 집에서 내 보낼 수 있다.” 여기서 추한 것이 뭘까 라는 의문이 드는 데, 율법학자들의 해석은 분분했다고 합니다. 학파에 따라서는 밥하다 태워도,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도, 그건 추한 것이므로, 이혼 사유가 된다고 하였고, 심지어는 자기 아내보다 더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발견해도 아내를 버릴 수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이혼할 권리는 오직 남자에게만 있었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처럼 취급되었고, 남편으로부터 학대받아도, 그런 생지옥으로부터 탈출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남편으로부터 소박맞고 길거리로 쫒겨 나게 되면, 여자 혼자 살아 가기가 막막 했습니다. 모세가 이혼 증서를 써 주라고 했던 것은, 이런 경우 약자인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나마 이혼 증서라도 있어야만,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해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사람들 마음이 완고해서, 그래서 도무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모세가 임시방편으로 그렇게 쓴 것이지, 원래 하느님의 뜻은 그렇지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결혼은 일부다처도 아니고, 동성결혼도 아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하여, 둘 이 한 몸이 되는 것이고, 이 것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이므로, 사람이 풀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부부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만큼, 어떤 부당한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유심히 읽어 보면 그 당시 약자 계층이었던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예수님의 따뜻한 마음이 읽혀 집니다. 어린이 들이 예수님에게 오는 것을 막자 예수님께서는 언짢아 하셨으며,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교만하지도, 허세를 부리지도, 자랑하지도 않는 어린이들,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며 모든 것을 부모에게 맡기는 어린이처럼,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 하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만과 허세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근거 없이 교만하고, 이유 없이 서로를 무시하고 차별합니다. 여자라 해서, 외국인이라 해서, 돈 없다 해서, 동성애자라 해서, 시골 출신이라 해서, 영어를 못하다 해서, 장애가 있다 해서,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어 무시하고 차별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납니다.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고, 어린이도 어른도 심지어 범죄자라 할지라도 한 인간으로서 똑 같이 존중 받아야 합니다.
차별 없는 세상은 세월이 가도 영영 오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차별 없는 가정은 부부가 노력해서 만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차별 없는 마태오 성당도 우리 힘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성찰하고 뉘우치고 결심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 처럼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그런 순수함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이 미사 중에 함께 기도 드립시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자신들이 뭔 가가 된 듯한 착각을 했던 것 같고, 복음서를 보면 다소 오만한 언행도 있었습니다. 지난 주 복음 이야기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장차 겪으실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거기에는 아랑곳없이 자기들 중에서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 일행이 사마리아 지역을 지날 때에 사마리아인들이 환영하지 않자, 야보고와 요한이 보여준 반응은 그야말로 가관이었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이 말 속에는 허영과 교만, 그리고 잔인함마저 엿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자기 일행이 아닌 다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 내니까, 그 꼴이 보기 싫어, 그 사람을 제지하려 했다고 합니다.
오늘 1 독서 말씀 이야기도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서 영을 조금 덜어 내어 70명의 원로들에게 나줘 주셔서, 그들이 예언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중에 두 사람, 엘닷과 메닷은, 남들은 다 모여 있는 천막으로 가지 않고, 자기 진영에 머물면서 예언을 합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그들을 제지해야만 한다고 모세에게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그 두사람에게 괘씸한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말합니다. 차라리 모두가 다 예언하면 좋겠다고, 모두에게 다 주님의 영이 내려지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막지 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세상에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그리그도인 보다도 더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삽니다. 이들은 비록 예수님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런데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고, 이미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인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천주교인들, 우리끼리만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왕국이 아닙니다. 그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넓고, 훨씬 더 큰 나라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서운한 말씀이 결코 아니라, 오히려 기쁜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구원의 문이 크게 열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몰라도 구원받고, 성당에 안 나와도 구원된다면, 그렇다면 구태여 성당에 안 나와도 되고, 전교도 안 해도 될까요? 절대 그렇지가 않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불려 주셨고, 계명을 지키라 하셨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고,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는 일꾼들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감사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그 분의 계명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손과 발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잘라 버리고, 눈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빼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멀쩡한 몸을 갖고, 죄인으로 살아가기 보다는, 차라리 손과 발, 눈이 없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선 보다 엄격하게,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는 보다 관대하게 대할 수 있도록 새롭게 결심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화답송,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네,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을 깨우치네,” 라는 시편 말씀처럼, 우리 일상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에 더욱 맛 들일 수 있는 은총을 이 미사 중에 구합시다.
오늘 우리는, 우리 성당, 창립 18주년 기념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창립 기념일에 자선 바자회를 했었고, 우리 성가대와, 또 우리 학생들로 구성된, 세실리아 앙상블의 축하 무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작년에도 그랬고, 올해도 특별한 행사 없이, 기념 미사만 드립니다.
코로나로 인해, 그동안, 참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야외미사도, 패밀리 캠프도, 매주일 점심 식사도 일체 못하고 있습니다. 미사에 참례하는 교우들의 숫자도 반으로 줄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우리가 낙심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때 일수록, 서로 힘과 지혜를 보아, 보다 튼튼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보다 나은 공동체를 희망하며, 주님의 은총을 이 미사 중에 기원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성모님 곁에서 십자가 아래에 머무는 공동체입니다. 앞의 제단에서 보듯이, 십자가 아래에는 성모님이 서 계십니다. 성모님은 절망과 좌절 속에 서 계신 것이 아닙니다. 아드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속에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지만, 성모님은 통곡을 한다던 지, 주저 앉거나 하지 않습니다. 꿋꿋하게, 믿음으로, 서 계십니다. 언제나 그러셨듯이, 여전히 희망과 사랑 그리고 인내심으로 서 계십니다. 성모님은 아드님이 다시 살아나시기를 희망하셨고, 마침내는 그 부활을 경험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성모님처럼, 희망과 인내로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신, 망, 애, 곧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같이 한번 생각해 봅시다. 믿음의 대상과 희망의 대상은 사실 좀 다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모두 하느님에 관한 것이고, 또 이미 있는 대상을 믿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예수님은 분명히 하느님의 아들이고, 우리를 구원하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즉 믿음의 대상은 우리와 별개로, 우리와 상관없이 독립적입니다.
하지만 희망은 다릅니다. 우리가 만약 희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루어 질 수가 없습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것이고, 하느님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고,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희망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절대 하느님을 만날 수 없고, 우리는 절대 하느님의 것이 될 수 없고, 우리는 절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동의 없이는, 결코 그 일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을 줄로 믿어라”(마르코 11, 24). 바로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받을 것이라는 희망 말입니다. 하지만 바라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2독서에서도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바라지 않으면, 희망하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보다 성숙한 개인, 보다 복음적인 공동체를 꿈꾸며, 더 크게 희망하고, 더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복음적인 공동체는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임으로써,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공동체입니다. 서로 잘 났다고 나대고, 서로 잘난 사람 대접받으려고 싸우는 공동체는 예수님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2 독서 말씀처럼, 시기와 이기심으로 온갖 분쟁과 악행을 저지르는 공동체는 하느님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복음적인 공동체는 이와는 정반대로,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려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어린이는 힘 없고, 하루라도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 갈 수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오늘날의 난민, 가난한 사람, 노숙인, 장애인, 정신적 육체적 질병을 앓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고, 우리는 그들 가까이에서, 그들의 고통에 함께 슬퍼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고통 가운데서도 복음의 희망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오직 절망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 가 있고, 내가 지켜야 할 의무와 계명이 있다면,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순종하고, 더 겸손해지고, 더 많이 포기하고, 더 깊이 사랑하게 된다면, 나도 더 많이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야 말로 큰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희망은 이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지금 당장 나에게 한꺼번에 모든 불행이 다 닥쳤다고 합시다. 그래서 마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합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완전히 없지는 않습니다. 바로 묵묵히 참고 인내하는 일입니다. 내가 설령 세상에서 가장 큰 불행을 지금 겪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분명 자비하시므로, 틀림없이 나를 불쌍하게 여겨 주실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각자의 신앙이 더 커 지도록 희망하며 기도합시다.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 모두를 섬기는, 진정 주님의 참 제자가 되고 싶다는, 그런 거룩한 열망을 가집시다. 올바른 신앙과 확고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렇게 우리 공동체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공동체로 거듭 날 수 있도록 미사 중에 더 큰 희망으로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구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첫번째는“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제자들은 곧바로 대답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예언자 가운데 하나라고도 합니다. 제자들 편에서는 사실 별로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주위에서 들은 그 대로만 별 생각없이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질문은 좀 다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이 질문은 나 자신의 개인적이고 마음 속 깊은 곳으로 부터의 솔직한 대답을 요구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 이신가?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며, 예수님께서 나를 변화시켜 주심을, 여러분은 정말로 느끼거나 믿는지요? 예수님으로 인해 내 인생에서 뭔 가가 좀 달라졌는지요? 혹시 예수님이 안중에도 없었던 때는 없었습니까? 신앙이 없는 사람과, 별 차이도 없이, 똑같이 사는 것은 아닌지요? 신앙이 없는 사람, 예수님에 대해 일체 모르고, 예수님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떤 말을 해 줍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기쁘고 평화롭고 행복하십니까? 혹은 반대로, 예수님으로 인해 고난 받은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는 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기는 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사랑하기는 합니까?
베드로는 두번째 질문에“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제자들 가운데서 첫번째로 올바른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답을 듣고 만족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혹시라도 오해하지 않도록. 로마인을 몰아내고 다윗 왕국을 되찾을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장차 고난 받을 구세주 이심을 분명히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당장 자기 앞날이 더 걱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걱정하며 만류하는 베드로를 예수님은 단호하게 물리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베드로는 절대 안된다고 말리고, 예수님께서는 내 게서 당장 물러가라고 꾸짖습니다. 여기에 사람의 일과 하느님의 일이 서로 갈등을 겪습니다. 그리고 그 갈등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바로 이 십자가 때문에 스승과 제자가 언쟁을 벌입니다. 십자가 때문에 하느님과 인간이 갈등을 겪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없이는 참된 사랑도 없고, 십자가 없이는 참된 교회도 없습니다. 희생 없이 참 사랑이 있을 수 없고, 봉사 없이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먼저, 나 자신의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과 욕망을 버려야 하고,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참사랑을 위해 희생과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오늘 2 독서 말씀은 도무지 실천이 없는 사람, 그저 머리로만, 입으로만 믿는 사람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이렇게 말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람의 일만 생각했지 하느님의 일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일이란 십자가 없이, 희생 없이, 봉사 없이, 실천 없이, 그저 자기 자신의 안위와 영광만 챙기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쉬운 일, 편한 일, 즐거운 일만 좇아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을 버리고,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반드시 예수님을 따라야만 합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우리 각자는 참으로 의미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찬가지로우리에게도 예수님이 의미 있는 분 이시면 좋겠습니다. 그 분께서 마련해 주신 하느님의 구원이 우리의 끊임없는 회개와 실천을 통해 열매 맺을 수 있도록, 그래서 참된 자녀,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이 미사 중에 크신 은총을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