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연락선! 이는 성 마태오 한 끼 나눔 운동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갈 때는 물자와 음식을 싣고 가고, 올 때는 그곳, 다운타운 형제자매님들의 소식을 싣고서 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곳’이라든지, ‘노숙인’이라든지, ‘Skid Row’ 라든지, ‘홈리스’ 라든지, 혹시 이런 말들이 영 불편하게 들리지는 않으세요? 어쩔 수 없이 그런 호칭들이 통용되고 있습니다만, 가난하다고 해서, 집이 없다고 해서 대관절 꼭 그렇게까지 부를 이유가 있을까요? 우리와 갈라놓거나, 떼어 놓지 않고, 우리와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이름이 정녕 없을까요?
저는 그곳에 사는 형제자매님들을 더는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당의 열네 번째 구역으로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물론 그분들의 동의를 받지도 못했고, 제멋대로 해서도 안 되지만, 제 마음속에서는 이미 우리 교우와 똑같이, 형제자매로 대하고 있으며, 또 그렇게 부르고자 합니다.
뽀르찌웅꿀라, 열네 번째로 편입된 우리 성당 새 구역의 이름입니다. 그러니 이 시간 이후로는 노숙인도 홈리스도 아닙니다. 뽀르찌웅꿀라 구역 형제님, 자매님들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불러 주십시오. 남이 아니라 그들 또한 우리입니다. 매주 연락선이 다니는데 어찌 남이라 부르고, 매주 사랑을 주고받는데, 어찌 그들이라고 부르겠습니까? 구역장은 임시로 제가 맡겠습니다. 뽀르찌웅꿀라! 위대한 성인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그리스도를 만났던 바로 그 장소, 천사들의 여왕이신 성모님이 축복해 주시는 여기 이 도시! 뽀르찌웅꿀라는 로스앤젤레스의 도시 이름 이자, 우리 모두의 젓 줄, 로스앤젤레스 강의 이름입니다. 우리 성당의 새 구역이며, 성모님의 천사들이 지키고 있는 땅이고,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성지입니다.
오늘도 길거리 아무 데서나 흔하디흔하게 볼 수 있지요! 수도 없이 그냥 지나쳐 버리는 요청들, 부탁들, 그 절규들! Homeless! Hungry! Help me! please! 저는 노숙인입니다. 저는 배가 고픕니다.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여러분 이 것 아세요? 그건 게으른 거지들이 성의 없이 아무렇게나 막 적어 놓은 그런 유치한 낙서가 아닙니다. 죽어 가면서 피를 토해내는 심정으로 외쳐 보는 호소이자 절절한 기도입니다.
정말, 그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복음 속의 한센병 환자 말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한센병에 대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서 생긴 끔찍한 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전염까지 시키니, 그를 본 사람들은 놀라거나, 고개를 돌리거나, 무서워하거나, 멸시하거나, 도망치거나, 저주를 퍼부었을 것입니다. 길에서 갑자기 마주쳤다면 고함부터 지르면서 내쫓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 속의 이 인물은 어떤 수모도 다 견디면서 기어이 예수님 앞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나병 환자는 예수님이야말로 자신을 치료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는 우리와 닮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적어도 머릿속으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환자에게는 아는 것을 넘어서 놀랄 만치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분께서 원하시는 일인지, 그분께서 허락해 주실는지, 그분의 뜻에 맞갖는 일인지가 관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시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 하셨다.
아, 여러분, 이 얼마나 아름다운 구절입니까? 이 얼마나 감동적인 구절입니까? 이 얼마나 위대한 구절입니까?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인간의 비참하고 불쌍한 처지를 보시며 하느님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둔 장벽을 찢어 버리며 하느님의 손이 그 환자에 다다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영원한 말씀으로 지금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런데 왜 우리 뽀르찌울꿀라 구역 형제 자매들은 복음의 나병환자 처럼, 구하지도 않고, 청하지도 않고, 문을 두드리지도 않습니까? 왜 글자만 써 붙여 놓고 누워서 잠만 자고 있습니까? 왜 냐구요? 우리 대다수가 거들떠 보지도 않아서 입니다. 도와주지 않으니 희망을 잃어버린 지도 오래 입니다. 우리 뽀르찌웅꿀라 형제들은 다 압니다. 우리가 하고자만 한다면 자신들이 굶지 않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들은 압니다. 우리가 충분히 그 일을 해 낼 수 있다는 걸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나 잘 압니다. 우리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안 할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러한 불신은 그들 잘못이 아니라 마땅히 우리 책임인 거죠. 그렇게 우리 형제자매들이 우리에게 실망하고, 가족과 이웃을 원망하고, 이 세상 속에서는 미쳐가고, 딴 세상으로 그렇게 죽어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나자로를 위한 아브라함이 되어 주고, 여러분이 이승에서 우리 형제들을 품 안으로 따뜻이 안아 주십시오.
오늘 2 독서 말씀 처럼, 바오로 사도께서 그리스도를 본받았듯이, 우리 또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작은 이태석, 작은 성 데미안, 작은 켈커타의 성녀 데레사로 오늘을 살 수 있도록, 이 미사 중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 드립시다.
성 마태오 한 끼 나눔 운동이 조용하고, 순조롭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정성을 120개 종이봉투에 가득히 담았습니다. 메뉴는 크림치즈 달걀 베이글! 거기에다 바나나 한 개, 작은 물병 하나, 방울토마토 한 봉지, 냅킨 한 장, 마스크 한 장, 양말 한 켤레를 함께 넣었습니다. 목요일 점심시간에 맞추어, 노숙인이 많이 모이는 산 줄리안 공원 길가에다 차를 세우고, 저 혼자서 선물 박스를 차례로 나르고 있는 데, 어느새 거들겠다고 나서던 사람들도 있었고, 진심 어린 감사의 말을 건네 주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지난 수요일, 주님 봉헌 축일(2월 2일)에 이 운동이 공식적으로 발족 되었으며, 단 일주일 만에 24명의 후원자가 무려 5,579불의 성금을 모아 주셨습니다. 저 멀리 뉴욕주의 브루클린, 애리조나주의 길버트, 캘리포니아 곳곳의 산호세, 알함브라, 베이커스필드 등지에서 후원금을 보내 주셨습니다. 매달 후원을 약속하신 분 중에는 개신교 신자도 있고, 불교 신자도 있습니다. 두 형제님이 수백 켤레의 양말을 맡겨 주셨는데, 일일이 낱개로 포장을 해서 기증해 주셨습니다. 마스크를 기증해 주신분이 계시고, 음식 투고 박스를 맡겨 주신분도 계십니다. 이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들 드립니다.
우리 성 마태오 한 끼 나눔 운동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복음 운동이며, 일회용 행사로만 그치지 않는 지속적 운동이며, 자원봉사자들의 자유로운 참여로 이루어지는 자발적인 운동입니다. 그렇게 복음적! 지속적! 자발적인 운동! 이 운동은 쉽게 말해, 연락선의 직통 노선 하나가 개설된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수역을 오가면서 섬과 육지를 이어주는 연락선 말입니다. 불과 30분, 우리와는 지척에 있으면서도, 마치 저 멀리 외딴 섬이나 되는 양 거리를 두고 지내는 곳, 마약과 전염병, 거기다 범죄의 온상지로 낙인을 찍어 깔끔히 쓸어 내 버려야 할 곳으로 여기는 거기를, 매주 다녀오겠습니다. 목요일마다 물자와 사랑을 내려 주고, 올 때는 그곳 사람들의 소식을 받아 들고 오겠습니다.
24년째 노숙인을 위해 도시락 봉사를 해 오시는 성남 안나의 집 원장, 김하종 신부님은 날마다 650개가 넘는 도시락을 나눠 주고 계십니다. 김 신부님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매일 오후 한 시면 음식 준비를 시작 해야만 하는 데, 그 직전까지도 몇 명이나 올지를 모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번도 어김없이 다 채워졌다는 겁니다. 일컬어 한시의 기적! 그날그날 필요한 숫자가 딱딱 하고 나타나 준 겁니다.
이와 똑같은 기적을 저도 꿈꾸며 여러분의 도움을 청합니다. 매주 시장보고, 배달하는 일은 우리 중에 박요한 형제님, 그리고 제니 자매님과 같이 제가 하겠습니다. 하지만 수요일 오후와 목요일 오전 각각 2시간씩, 요리 및 포장 작업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봉사자들이 한두 번 정도는 쉴 수 있도록 여러분도 참여해 주십시오. 또한 여러분이 한 끼 나눔을 해 주실 때, 작은 액수라도 정기적으로 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 가정의 형편에 따라 매달 5불 혹은 10불을 꾸준히 후원해 주십시오. 10불이면 한 달 동안, 세명에게 영양가 높은 도시락을 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네.” 화답송으로 바친 시편 구절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 (루카 4, 18) 시키시는 메시아!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그러자 열병이 나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오늘 나 에게도 손을 내미십니다.
열병이 가신 부인은 곧바로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잖아요? 하느님의 은총을 진짜로 체험한 사람이라면, 당연한 모습입니다. 지나치고 쓸데없는 욕심, 비합리적인 생각, 과도한 집착, 어리석은 행동과 습관, 헛된 희망, 무뎌진 양심, 잘못된 양심, 끝 모르는 이기심, 식어버린 믿음, 냉혹한 무관심! 주님께서 우리 각자의 병든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손잡아 일으켜 주시고, 다시금 회복 시켜 주셔서, 우리 또한 주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 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길 청합시다.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린다는 욥의 끔찍한 고통, 이는 질병을 앓고 있는 숱한 환자들의 모습이고,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이중 삼중의 고통을 안고 겨우 하루를 살아가는 노숙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들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 형제인 그들을 끌어안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바로 그 복음에 동참하게 되면서, 넘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성 바오로의 오늘 2 독서의 고백, 사도이지만 보수도 원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독신을 지키고, 주님처럼 스스로 종이 되기를 바랐던 인물, 약한 이를 얻고자, 약한 이에게 약한 사람처럼 되고자 했던 진짜로 아름다웠던 사람. 우리 성 마태오 한 끼 나눔 운동에도 바오로 사도와 똑같은 마음으로 참여 할 수 있도록 이 미사 중에 열심히 기도드립시다.
코로나 19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고, 일상으로의 복귀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갈 일상이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출퇴근 길에 자주 보게 되는 노숙인들도 이런 경우입니다. 이들에게는 코로나도 무섭지만 당장 저녁 끼니가 더 걱정입니다. 엊그제는 제 생일이었는데, 많은 분이 전화와 문자로 축하를 해 주었습니다. 그저 모든 게 과분하고 황송한 일이어서 송구스러운 마음이 컸지만, 한껏 행복한 느낌은 종일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홍삼차도 한잔 마시면서 그날따라 시원하게 내리는 빗소리를 감상했습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 사실 별것도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어느 것 하나 아쉬운 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내가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이 추운 날 비를 피하며 떨고 있을 노숙인들이 수 만명인 데도 말입니다.
작년 6월 통계를 보면 로스앤젤레스 시 안에만 4만2천 명, 그리고 카운티 전체에는 6만6천 명 가량이 된다고 합니다. 길거리, 쥐들이 돌아다니는 냄새 나는 환경 속에서 폭행, 강간, 알코올, 마약에 노출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파도 병원을 찾아갈 돈이 없고, 외로워도 연락할 사람이 없습니다. 요즘같이 추운 밤, 어디 잠이라도 한번 편히 잘 수 있겠습니까? 샤워 한번, 화장실 한번, 식사 한번 안락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체가 면역력을 유지할 수 있을 조건이 안됩니다.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정신병을 앓거나, 여러 질병에 시달리다가 끝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을 돕지 않고서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을 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큰 도움은 되지 못하겠지만, 작은 나눔이라도 지속해서 이어 나갈 수 있도록, 성마태오 한 끼 나눔 운동을 여러분들과 함께 시작하고자 합니다. 모레, 주님 봉헌 축일, 한 끼 나눔 운동을 주님께서 손수 축복하고 이끌어 주시길 빌고, 오는 목요일에는 베이글을 구워 다운타운으로 찾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형편에 따라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한 주 동안 준비한 것을 들고 목요일마다 노숙인을 찾아갈 것입니다. 매주 한 번, 혹은 매달 한 번, 이웃에게 밥 한 끼 사는 마음으로 인정을 베풀어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2 독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걱정 없이 사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딱 한 가지 걱정,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는 것 말입니다. 성 마태오 한 끼 나눔은 분명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입니다. 나눔은 기쁨입니다. 나눔은 행복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 95장,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어서 와 주님께 노래 부르세. 구원의 바위 앞에 환성 지르세. 감사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세. 노래하며 그분께 환성 지르세.” 우리가 매주 드리는 주일미사는 감사의 노래, 기쁨의 환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눔 없는 기쁨은 완전할 수 없고, 나눔 없는 감사는 공허할 따름입니다.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곳이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며, 주님의 일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더러운 영이 외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며 감탄하였지만, 더러운 영은 오히려 예수님 그 자체를 인식하고, 소리 지르며 악을 씁니다.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어둠 속에서 빛이 더 밝게 드러나는 이치일까요?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도 어둠이 있고, 더러운 악이 도사리고 있어서, 눈부시게 빛나는 주님의 성심을 마주하기가 편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 때문이죠. 그러기에 성찰하고 통화하는 그런 힘든 과정을 매번 거쳐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 말은 더러운 영이 내 뱉었던 고백이지만, 우리가 모두 따라 바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다만 더러운 영이 겁에 질려서 외쳤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바치는 고백입니다. 그분의 자녀로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더러운 영은 쫓겨나고 그 사람은 이제 정상을 되찾습니다. 혼돈은 가고 평정이 찾아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언제나 힘이 있고, 권위가 있었으며, 사람들은 감탄했고, 기적을 목격하였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않고,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되고, 그분께서 베푸시는 기적도 체험하게 됩니다.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가 날마다 새롭게 빚어지고, 그분의 빛으로 빛을 보게 되고(시편 35, 10), 심지어는 그분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요한 14, 12)
우리가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정신으로 한끼 나눔을 잘 실천할 수 있도록, 이 미사 중에 필요한 은총을 구하고, 노숙인들의 영육간 건강을 위해서도 열심히 기도드립시다.
오늘 우리는 아주 특별한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재작년인 2019년 9월 30일, 교서“그들의 마음을 여시어”를 반포하시고, 연중 제 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제정하셨습니다. 오늘은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맞이하는 하느님의 말씀 주일입니다. 교황님께서는 모든 교회가 이날을 장엄하게 지내도록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이야말로 우리가 경건하고 친숙하게 대해야 할, 자고로 명실상부한, 하느님 백성의 경전이라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말씀,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을 쓰러뜨리기도 하고 정반대로 일으키기도 합니다. 남을 무시하고 기를 꺾는 말이 있는가 하면, 위로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이 있습니다. 거짓으로 이간을 부추기는 말이 있는가 하면, 용서와 화해를 주선하는 말이 있습니다. 독을 뿜어내는 사악한 말이 있는가 하면, 사랑과 기쁨을 심어주는 좋은 말이 있습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평소에 자주 하는 말에 따라서 사기꾼, 험담꾼, 협잡꾼이라고도 하고, 반대로 점잖은 사람, 인격자라고도 합니다. 사람의 말 한마디가 상대방을 병들게도 하고 공동체를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반대로 사람의 말 한마디가 상대방을 성장 시켜 주고, 공동체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한낱 인간의 말도 이런 힘을 지녔는데, 하물며 하느님이시야!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삼라만상 우주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우러러 받들었으며, 당신의 목숨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셨으며, 자주 묵상하고 실천하고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용서와 치유, 생명과 구원의 말씀이었으며, 말씀하시는 그 자리에서 이루어지게 하는(루카 4, 21) 권능의 말씀이자, 변하지 않는 영원한 말씀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교서에서 교황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1 독서 요나서만 봐도 그렇습니다. 예언자 요나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다소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이제 사십일지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 4) 니네베의 죄악이 치솟아, 하느님께서 직접 나서셔서 심판을 예고하시니, 이 말씀을 달가워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이 말씀을 전하라고 요나에게 명령하셨지만, 요나는 어찌 된 일인지 기를 쓰고 하느님을 피해 달아납니다. 그런 중에 바닷물 속으로 던져지게도 되지만, 요나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집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고도, 여전히 이기적이고 옹졸한 말만 내뱉는 요나가 얄밉고 또 한심하게도 보입니다. 요나는 하느님께 화부터 냅니다. 하느님께서 니네베 사람들을 멸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럴 줄 진작부터 알았다면서 펄펄 뛰고 난리도 아닙니다. 요나가 왜 이렇게 화를 내나요? 요나의 예언이 결국은 틀린 게 됐으니, 그래서 자기 체면이 깎였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인간 같지도 않은 죄인들, 니네베든 뭐든 이방인들은 모조리 다 죽어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을까요?
남인데, 그게 수십만이 되었든, 수백만이 되었든, 죽거나 말거나 내가 무슨 상관이야? 남이야 어찌 되든 말든, 잠시나마 뜨거운 햇볕을 가려주던 아주까리가 더 소중했던 요나, 그러다 잎사귀 몇 개가 시들어 버리자 못내 아쉬워하는 요나, 이런 모습이 어쩜 이리도 우리와 닮았는지요! 우리의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면 하느님의 말씀은 쓰디쓴 맛을 남기고, 가슴까지도 미어집니다. 코로나로 2백만 명이 넘게 죽어도, 수천의 난민들이, 수만의 노숙인들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험에 빠져 있지만, 우리 눈은 그저 자신과 가족의 안일에만 머물고 있으니 이를 어찌합니까?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코 1, 14) 요나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니네베 사람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들의 죄를 뉘우쳤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예수님의 요청에 우리 또한 절박한 심정으로 그리고 절실한 마음으로 응답하면 좋겠습니다. 미루지 말고, 말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구원을 체험하고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 깜깜한 바닷속 그것도 물고기 배 속이니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온갖 소음을 들을 리가 만무했겠지요? 코로나로 인해 어쩌면 우리도 지금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하는 듯합니다. 나쁜 말, 쓸데없는 말, 거짓말, 가시 돋친 말의 공해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되어, 우리 귀와 입, 마음까지도 조금은 깨끗해진 듯한 느낌!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거듭났듯이, 지금이야말로 회개와 기도를 위해 더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집중할 다시없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들입니다. 그물에 걸려서 물 바깥, 주님 가까이 끌어 올려집니다. 이때 옛것은 죽어 없어지고,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주님 사랑의 그물에 갇혀, 하느님께서 손수 보살펴 주시는 나라로, 끌어 올려졌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복음을 믿고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느님의 말씀 주일, 말씀에 귀 기울이며, 더욱 감사드릴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제일성(第一聲), 바로 예수님의 첫 번째 음성을 듣게 됩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느냐.” What are you looking for? 이는 우리가 쇼핑몰에서 자주 듣는 말이기도 합니다. I am just looking. “그냥 구경 좀 할게요”라고 가볍게 허락을 청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속에 정해 둔 물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사실 어떤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요한은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같이 서 있던 두 명의 제자에게 증언합니다. 마치도 희생양처럼 자신을 제물로 바쳐 이 세상의 죄를 없애 주실 분! 이 말을 들은 요한의 두 제자는 곧장 예수님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뒤돌아서시어, “너희는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분명한 대답 대신에 도리어“스승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자기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직은 확실치 않아서일까요? 상점에서 머뭇머뭇 그냥 구경 좀 할게요 라고 말하듯이, 그저 예수님을 좀 더 알고 싶다는 뜻 정도로 들립니다.
“와서 보아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 이들을 가르치기보다는 그날 저녁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머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처럼 식탁에서 감사 기도를 바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빵을 나누어 주시고, 성경 말씀도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꿈꾸던 세상, 목숨보다도 더 귀중하게 여겨 왔던 당신의 사명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셨을지 모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 누구보다도 굳건한 신앙, 그리고 확고한 희망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시몬의 동생 안드레아가 형에게 외쳤던 소리입니다. 이스라엘을 구해 줄 임금님, 그 메시아를 바로 눈앞에서 보게 되리라고 어디 꿈이라도 꾸었겠습니까? 개천 치다 금을 줍는다고 했는데, 뜻밖에 맞닥뜨린 행운에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모릅니다. 그토록 채워지지 않던 빈 가슴이 한순간 밀물처럼 채워집니다. 성인전을 읽으며 무릎을 ‘탁’ 치는 사람이 있지요. 그래 바로 이거야! 내가 진짜 원하는 삶! 이들은 예수님과 마주하면서 가슴이 뛰었을 것입니다. 이 같은 만남은 사람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기도 합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새로운 꿈을 품게 되고, 새로운 열망이 솟아납니다. 운명의 만남, 억겁의 만남, 이제 막 새롭게 눈이 열린 안드레아는 곧바로 자기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고,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케파, 단순히 이름뿐만 아니라 그의 인품과 직분까지도 튼튼한 반석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물론 사람의 변화라는 건 절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베드로든 안드레아든 또 다른 제자든 자신들 또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떤 위대한 만남도 단시간에 완성되지 않듯이, 그들 역시 듣고 배우고 사랑하고 실천하고 선포하는 여정을 인내롭게 겪어 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마침내 하느님의 사랑을 뼛속 깊이 깨달은 후에는, 자신들도 신앙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순교의 피를 뿌릴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2 독서도 주님과 결합한 사람, 다시 말해 예수님 때문에 변화된 사람, 곧 세례 받은 우리 신앙인에 관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세례는 영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의 몸은 더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이자 성령의 성전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내 몸의 주인은 나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로 바뀌었고, 내 몸의 목적도 하느님을 위한 것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은 나 자신의 쾌락 혹은 불륜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느냐? 지금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행복이나 평화를 구한다고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도 와서 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어디 떠나지 말고 당신 안에 머물라고 말씀 하실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야말로 우리가 머물 곳입니다. 교회는 세례자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분을 증언해 주는 곳이고, 그분께로 인도해 주는 곳이며, 그분을 만나게 해 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곳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흠숭하고, 빵을 나누고, 우리 또한 이웃의 발을 씻겨 주는 곳입니다.
What are you looking for? 이는 거꾸로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무엇을 원하십니까? 제가 오늘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제대로 나부터 한번 바꿔보자’라는 각오가 선 사람에게는 더욱더 또렷하게 들릴 것입니다. 오늘 1 독서의 사무엘처럼, 우리도 깨어 아룁시다.“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오늘 화답송의 이토록이나 아름다운 시편처럼 우리도 같이 기도드립시다. “주님께서는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주님,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시편 40, 7-8)‘오십시오. 보십시오,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