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의 효율적 대응을 위해, 지난 3월 19일, 주정부의 자택대피령이 내려졌었고, 그로부터 어느덧 반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본당 창립 17 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일부는 이곳 성당 마당에서, 그리고 일부는 각 가정에서, 이 시간을 함께 하고 있지만, 여전히 다같이 모일 수가 없는 이 현실이 참으로 아쉽기만 합니다. 코로나가 바꿔 놓은 수많은 일상 가운데는 생방송 미사도 있습니다. 지난 성주간, 바티칸 전례 시청자수가 작년의 백오십만명에서, 올해 오백오십만명으로 껑충 뛰기도 했고, 근처 대부분의 한인성당들도, 주일미사를 실시간으로 방송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미사와 심령성체는 지금과 같은 위험한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권장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위험요소도 있기에,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교황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 공동체가 빠지게 되면, 영성체가 없다면, 성사들을 외면하면, 함께 모인 하느님의 백성을 떠나게 되면, (그 신앙은)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백성으로부터 떨어져서, 순전히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하느님을 찾아 나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각 개인의 이기적인 방식을 떠나야 하고, 구체적인 교회, 그리고 실질적인 성체성사에 항상, 그리고 반드시, 연결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4월17일 아침미사)
따라서 방송미사 시청이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긴다면, 집에 머무는 대신, 더욱 정성된 마음으로 심령성체를 하고, 공동체 전체를 생각해서, 하루빨리 성전에 다같이 모일 수 있도록, 더 많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입니다. 마태오 복음에 이 비유가 포함된 이유에는 아마도 마태오 공동체 안에서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지녔던 편협한 마음을 훈계하기 위해서 일지도 모릅니다. 교회 안에는 조상 대대로 야훼 하느님을 섬겨왔던 유대인만 있었던 게 아니라, 온갖 부류의 비유대인들, 거기에는 이교도로부터 막 개종한 사람들도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피부색과 언어가 달랐고, 음식과 문화와 전통도 달랐습니다. 유대인 가운데에는, 이렇게 새로 모여든 교인들을, 그저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텃세 부린다는 말이 있듯이, 먼저 자리 잡은 사람들이 뒤에 들어오는 사람을 업신 여기고, 마을 토박이는 동네 뜨내기를 얕잡아 보고, 내국인은 외국인이나 난민을 종종 멸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이야기 속에서의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 와서 일한 일꾼이든 오후 늦게 와서 일한 일꾼이든 그 모두에게 똑 같은 사랑을 드러냅니다. 보세요, 오늘 비유의 초점은 일이나 노임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당신 나라로 부르셔서, 우리 각자에게 알맞은 일을 맡겨 주십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한 보수를 똑같이 나누어 주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계산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로써, 우리가 뭘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무상의 선물로써, 그렇게 누구에게나 똑같은 선물, 곧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 구원의 선물은 주님께서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로 마련해 주신 은총이지, 우리의 어떤 선행이나 공로를 통해 성취하거나 취득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선한 포도원 주인, 아무도 제외시키지 않고, 누구에게나 후하신 하느님, 1독서 말씀처럼 그분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같지 않고, 그분의 길은 인간의 길과 같지 않은 점에 우리는 거듭 감탄하게 됩니다. 혹여 일을 못 구해 실망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루 에도 몇 번이나 일꾼들을 찾아 나서는 친절한 마음, 나중에 데리고 온 일꾼에게도 하루 일당을 온전히 다 손에 쥐어 줘서,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과 따뜻한 저녁이라도 한끼 넉넉히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 베풂에 있어서 인색함이 없고, 남을 업신여기지도, 차별하지도 않는 마음, 그 마음은 우리가 언제나 우러르고 본받아야 할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의 포도원에 불린 일꾼들입니다. 일을 맡겨 주셔서 감사하고, 오늘도 일 할 수 있어서 기쁜 우리, 오늘 창립 17주년을 맞아, 날마다 선하신 주님을 닮고, 갈수록 더 하느님 나라를 닮은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함께 약속하십시다.
“주님,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용서에 대해서 베드로는 그렇게 질문합니다.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 뻔뻔하기가 이를 데 없고, 염치마저 없는 인간,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도대체가 만무방, 경우도 없고, 예의도 없이 도리어 더 성질 내고, 자기 잘못을 나에게 다 뒤집어 씌운 그 장본인, 그로 인해 내가 얼마나 많은 수치와 모욕을 당했는지, 내 가족이 또 얼마나 손해를 입었는지, 그걸 생각하면 억울해서 잠도 안오는데, “이런대도 주님, 그 인간을 용서해야 합니까?”용서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성경 속 베드로의 질문 보다 훨씬 더 초라하고 인색하게 들립니다. “그 인간, 생각만 해도 분노가 치미는데, 주님, 어떻게 용서 하란 말입니까?”
그런데 오늘 비유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그 후안무치 하고 배은망덕한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만 탈렌트($3.5 billion), 이렇게 상상도 못할 어마어마한 액수의 빚을 지고도, 전액 모두 탕감 받은 사람 들입니다. 세속의 때묻고 무뎌진 양심으로 생각해보면, 설마 내가 그 정도까지 죄를 지었을 까 싶습니다만, 그러나 나도 모르게, 일생 내가 저지르는 죄가 많고, 더군다나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의 구원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분명, 크나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만 탈렌트라는 천문학적 액수는, 이렇게 하느님 사랑의 크기와 높이, 길이와 부피를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이처럼 무한하신 사랑으로 인해,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그 사랑을 알고 있으면서도, 잘못한 이웃에게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적개심과 분노, 무시와 외면, 증오와 비방, 혹은 상종도 못할 죄인으로 취급하지는 않는지요? 자신은 주인으로부터 엄청난 액수를 탕감 받았음에도, 동료가 석 달치 월급 정도의 돈을 갚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의 동료를 감옥에 보낸 그 무자비한 종처럼, 이 비유 말씀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내 죄를 무한정 용서 해주시는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 그와는 반대로, 용서에 인색하고, 다분히 편협하고 제한적인 나의 사랑. 하느님과 나의 이런 차이로 인해 결국에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 무비자한 종은 형리에게 넘겨지고 맙니다. 하느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고, 하느님의 용서에는 제한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건은 있습니다. 단 한가지의 조건, 우리에게 잘 못한 일을 우리가 먼저 용서 하는 일입니다.
성녀 대 데레사의 저술, “완덕의 거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이렇게 가르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 우리는 고행을 많이 했으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혹은 기도를 많이 했으니, 혹은 재를 많이 지켰으니, 혹은 주님 위해 모든 것을 바쳤으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렇게 얼마든지 다른 조건을 내세울 수도 있었지만, 주님께서는“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는 조건만 붙이셨습니다.
이렇듯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도 못합니다. 1독서 말씀처럼, “인간이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어찌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를 빌 수도 없습니다.
상처가 크면 용서도 쉽지 않습니다. 용서가 너무 어려워, 마치 영웅적인 행동 처럼 보입니다. 용서는 분명, 어떤 것에 대한 위대한 행동이기도 하지만, 용서는 또한 어떤 것에 대한 단순한 깨달음 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중요합니다.
나 역시도 죄 지은 그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사실, 나 또한 고의가 있든 없든, 과실이 있든 없든, 남에게 피해를 주기도 한다는 사실, 무엇보다 내가 남을 심판하고 단죄할 처지에 있지 않다는 사실, 교회도 용서를 필요로 하는 죄인들의 공동체라는 사실. 그 사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인다면, 데레사 성녀처럼 우리도 진실한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같이 불쌍한 사람은, 용서해줄 것은 적고, 용서받을 것만 많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흔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십니다. 무한대의 용서입니다. 미운 생각이 들 때 마다 하는 용서이고, 그 미운 마음이 사라지고 완전히 잊혀 질 때 까지의 용서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습니다. (1코린 8,11 참조) 우리에게 잘 못한 이를, 이제는 더 미루지 않고 용서하겠다고, 또 다시 다짐하고, 또 한번 약속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1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형제적 충고,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형제적 교정입니다. 교회 안에서 잘 못한 형제, 심각한 죄를 저지른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나?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려 놓습니다. 공동체를 이리 저리 휘 젖고 다니며, 온통 뿌옇게 흙탕물을 만듭니다. 가만히 보고만 있 자니, 공동체 전체가 피해를 입게 되고, 직접 만나서 말하자니, 상대방의 격한 반발이 걱정됩니다. 문제를 뻔히 보고, 알면서도 망설이고 주저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뚜렷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적극적인 충고, 형제적인 교정입니다. 원수처럼 여기지 말고, 형제처럼 타일러야 합니다. 사랑 어린 충고여야 하고, 겸손에서 나온 충고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 형제를 얻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교정 없는 용서, 그러니까, 그 형제가 큰 잘 못을 했는데도, 마치 아무일 도 없었던,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 그렇게 해서는 형제를 얻지 못합니다. 교정 없는 용서, 속으로는 고름이 생겨 이미 살이 썩고 있는데, 그건 그대로 방치해 두고, 바깥의 보이는 피부만 바늘로 꿰메는 것과 같습니다. 교정 없는 용서, 그 형제는 뉘우침 없이 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하느님의 은총으로 부터 멀어지고, 결국 그렇게,우리는 한 사람을 잃게 됩니다.
형제적 교정은 뒷담화, 그 사람 앞에서는 외면하거나,감추거나,침묵하고, 그 사람이 없는 데서 욕하고, 비난하고, 헐뜯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험담 속에는 복수와 증오심이 묻어 있지만, 형제적 교정에는 겸손과 사랑이 있습니다. 뒷담화는 이기적이지만, 형제적 교정은 이타적이고 공동체 적입니다. 진정한 충고는 그 사람의 잘못을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일로 여기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일로 받아 들일 때에 비로소 가능해 집니다. 사랑의 충고는 그 사람을 내 가족 처럼, 내 형제 처럼 받아 들일 때에, 비로소 가능해 집니다.
무엇보다 먼저 단 둘이서 만나야 하고, 그래도 안되면,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타이르고, 그래도 안되면 교회에까지 알려야 합니다. 어떻게 든 공동체에서 추방되는 일이 없도록, 중간에 멈추지도,끝까지 포기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오늘 2 독서 말씀 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은 다 갚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의 부채, 사랑의 빚입니다. 한 명의 형제를 얻고, 공동체를 보다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비록 말처럼 쉽지는 않겠으나, 그 사람과 마주 앉을 용기를 내면 좋겠습니다. 길 잃은 한 명의 형제를 얻기 위해, 공동체가 서로 마음을 합쳐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작아도, 비록 둘이나 셋일지라도, 공동체가 바치는 기도에는 힘이 있습니다. 공동체가 바치는 기도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공동체가 바치는 기도에는 주님께서 계십니다.
하지만 교회가 하나로 일치되지 못하고, 잘못된 악행이 교회안에서, 고쳐지지 않고,여전히 지속된다면, 교회는 그 힘을 상실하게 될 것이고, 기도 마저도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공동체를 지키는 충실한 파수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대신하여,잘못은 경고하고, 위험은 미리 알려주는 사랑의 파수꾼, 모두가 같이 거룩해지고, 한 명이라도 더 구원될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는, 오늘도 깨어 일하는 주님의 파수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앙꼬 없는 찐빵이란 말이 있습니다. 따끈한 찐빵을 반으로 쪼개면, 그 안에 부드럽고 달콤한 앙꼬, 팥앙금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팥소가 빠진 찐빵은 어떻습니까? 밍밍한게, 그야말로 니 맛 내 맛도 안 납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또한 실천이 없다면, 도대체가, 희생도 없고, 나눔도 없고, 봉사도 없다면, 다시말해, 십자가가 없다면, 그저 앙꼬 없는 찐빵,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 합니다. 십자가가 무섭고 싫어서, 한사코 피하려 하거나, 내팽개치면, 그리스도의 향기도, 그리스도인의 풍미도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지난 주일, 베드로 사도의 고백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주실 메시아, 장차, 권좌에 오르게 될, 귀하신 분입니다. 곧, 승리의 군왕, 권세와 영광의 군주가 되실 분입니다. “주님, 이제 꽃 길만 걸으세요. 저 베드로가, 주님을 지켜 드리겠습니다.”주님께서 걸어가실 저 꽃 길, 베드로도 그 길을 걷고 싶어 합니다. 어디, 베드로 뿐이겠습니까? 여기 있는 우리 모두도, 험한 일 겪지 않고, 그저, 한 평생, 꽃 길만 걷기를 원하고 또 원합니다.
그런데, 임금이 되실 메시아께서, 마른 하늘에 날벼락,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만 한다니, 베드로는 펄쩍 뛰며, 필사적으로 말립니다. “맙소사, 절대 안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걱정해서 한 말이었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야단을 치십니다.“사탄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너는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해야만 한다 하시고, 베드로는 절대 안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가 언쟁을 벌이고, 하느님과 인간이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고, 보다 쉽고, 보다 편한 길을 찾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정반대였습니다. 그게 비록 고난의 잔이고, 그게 끝내는 죽음의 잔이라 할지라도, 성부의 뜻이므로, 그 잔을 남김없이 마십니다.
“맙소사, 주님께는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베드로의 이 말이 달콤하게도 들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리어 화를 내십니다. 베드로의 모습이, 저, 광야에서의 유혹자, 쉽고 편한 길을 부추기던 그 사탄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내 길을 막지 말고 꺼져라”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쉬운 길에 대한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십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충직한 만류도 뿌리치십니다. 그리고 홀로 수난의 길, 십자가의 희생, 십자가의 제사, 십자가의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중요한 점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사랑 방식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모든 것, 목숨 까지도 내어 주는 행동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같은 하느님의 사랑방식에 우리 모두를 초대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신 분, 그분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을 알고 싶으면, 십자가를 향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닮고 싶으면,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일치하고, 십자가에서 이웃을 만나게 됩니다. 일상의 크고 작은 십자가가 때로는 두렵게도, 때로는 귀찮게도, 때로는 무의미하게도 느껴집니다. 그럴 때마다 앞장 서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을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희생 없는 사랑, 봉사 없는 신앙, 봉헌 없는 미사, 십자가 없는 교회, 나눔 없는 기쁨, 기쁨 없는 열정은, 그야말로 앙꼬 없는 찐빵, 짠 맛 잃은 소금, 그저 한낱 곤충이 벗어 놓은 허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몸이 산 제물이 되고, 우리의 행실이 비로소 합당한 예배가 될 수 있도록, 오늘도 주님의 은총을 구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새이름을 주십니다. 아람어로 게파, 그리스어로 베드로, 시몬은 이제, 바위, 반석이라 불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고, 교회의 열쇠를 맡겨 주십니다. 이로써 베드로는, 사도중에 으뜸이며, 주님의 양떼를 돌보는 최고 목자가 됩니다. 베드로가 받은 열쇠, 다시 말해 베드로에게 부여된 지위와 권한은 베드로 한 사람 에게서 끝나지 않고, 후임 교황에게 대대로 전해집니다.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이자,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지상 교회를 이끕니다.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베드로를 교회의 수장으로 뽑으신 분은 예수님 자신 이십니다. 그런데 보세요, 베드로가 바위 같아서 뽑으신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뽑아 주셨기에 바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소신이 없고 우유 부단 했으며, 스승을 배반하는, 그런 비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뽑아, 교회의 반석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런 주님을 위해 순교까지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선택, 예수님의 결정은 이렇듯 우리 눈에, 언제나 놀랍기만 합니다.
예수님의 선택에 있어서 오늘 베드로의 대답은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론 이 대답, 이 고백 하나로, 겁 많던 베드로가 당장에, 반석, 튼튼하고 반듯한 바위로 바뀐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점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베드로는 이 고백 하나로, 충분히 인정과 축복을 받았으며, 교회의 반석으로 선포됩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께서 차츰, 그를 굳건한 반석으로 만들어 나가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도 우리 교회 공동체를 튼튼하게 지탱해 줄, 크고 작은 기둥으로 쓰고자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 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는 즉시, 예수님은 구원자이시고, 하느님이시고, 성자이시다 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리 시간에 배운 것,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것을 넘어, 나만 알고 있는 예수님, 내가 만나는 예수님은 누구인지요? 나 에게 있어서 그분은 어떤 분인가요? 나와 그분은 무슨 사이입니까? 그분은, 매주일, 나와 내 가족이 봉헌하는 이 미사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은 그런 분이 신인=가요? 정념, 내가 믿고 의지하는 분인가요? 그 분은 나에게 매순간 사랑을 명령할 권한이 있는 분인가요? 오늘 1독서 바오로 사도의 고백입니다. “하느님은 풍요와 지혜와 지식이 정녕 깊으신 분.””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고 친밀해 질수록, 개별적인 하느님 체험도, 나만의 진실한 고백도 가능해 집니다. 다른 사람을 따라 흉내만 내는 신앙과, 내가 체득하여, 내 삶으로 표출해 내는 신앙은 사뭇 다릅니다. 영혼 없는 고백과 기쁨과 감격에 찬 고백은 다릅니다. 우리 각자의 신앙고백이 진실되고, 주님 보시기에 올바른 고백이 될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인정하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지금 부족하고 지금 나약하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의 우리를 받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점차 우리를, 튼튼한 바위로, 어떤 어려움에도 굽히지 않는 굳건한 반석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교회로 불러 주신 분도 주님이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명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그 분에게서 나왔고 그분을 통하여 그 분께로 갑니다. 그분은 우리의 으뜸 목자이며 반석입니다. 우리의 눈이 그분을 바라보고, 우리의 마음이 그분 안에 머무를 때, 저승의 세력도 우리를 헤치지 못합니다.
주님께 오늘은 나만의 고유한 언어로, 나의 신앙, 나의 사랑을 조용히 고백하십시다.
오늘 우리는, 한 여인의 애절한 외침을 듣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 여인은 가나안 사람입니다. 유대인의 눈으로 본다면, 한낱 이방인에 불과합니다. 배은망덕한 것들, 하느님도, 율법도 모르는, 그저 불결하고 죄 많은 인간일 따름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 예수님의 태도는, 평소와 다르게 너무 낯설기만 합니다. 호되게 마귀들린, 딸을 살려 달라는데, 예수님께서는, 대꾸 한마디도 안 하십니다.
제자들 눈에도, 이 여인의 처지가 너무 딱하게만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좀 보살펴 주셨으면 하고, 여인을 거들어보지만, 예수님께선 냉정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한 술 더 뜨서, 모멸감을 주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그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지녔을 법한, 그런 차별과 선입견이 묻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듣기에도 불편한 이 대화를 통해, 이 여인의 신앙이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에 놀라며 감탄합니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태도를 바꾸어, 여인의 딸을 고쳐 주십니다.
이 사건은, 특히 초대 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졌습니다. 성자께서 이방인에게도 큰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회안에서의 차별, 즉 유대인과 이방인 출신 간의 차별을 없애고, 예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대로,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이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구원은 혈통이나 율법으로 주 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드는 믿음, 주님 말씀을 받드는 믿음으로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단지 이 여인이 재치 있게 대답을 잘 해서, 그래서 이 여인을 도우셨습니까? 단순히 말을 잘 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 보았고, 예수님의 외면과 침묵에도, 평정심과 인내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혹시 자기 종교로부터 미움을 받아 혹시라도 생길지 모를 폭행이나 불이익까지 감수하는 용기도 있었습니다.
어디서 이런 힘, 필사적인 용기, 강인한 집념이 나왔을까요? 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딸에 대한 사랑때문에, 예수님의 거절 에도, 수치감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마음속에서, 사랑을 보셨고, 하느님이신, 당신 자신의 위대한 사랑으로 여인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사랑이 점점 사라져 가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선입견과 이기적 욕심이 우리 눈을 가렸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다른 민족이어서, 그들이 다른 세대여서, 혹은 그가 단순히 나와는 너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는 정작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사랑의 노래는 듣지 못하고 오물로 가득 찬 악취만 맡게 됩니다. 사랑으로 꽃피지 못하고, 미움으로 빨리 시들고 맙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다고 했습니다. 참 사랑은 하느님을 감동시킵니다. 참 사랑은 하느님을 움직입니다. 우리 양심 깊숙한 곳으로부터 사랑을 찾아 냅시다. 주변으로부터 들려오는 긴박한 요청에 사랑으로 응답합시다.
오늘도 사랑으로 지혜롭게, 오늘도 사랑으로 인내 롭게 기도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보시고, 당신의 신적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실 것입니다.
어제 아침, 우리 성당 5명의 학생들이, 이 곳에서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는 토요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는, 5명의 예비자들이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게 됩니다. 이곳, 임시 제대, 위쪽으로 보이는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에는 “성모님께서 지니셨던 믿음을 우리도 가지게 해 주십시오”라는 뜻으로 “May your faith be ours.”라는 영어 문구를 써 놓았습니다. 새 형제, 자매님들을 맞아들이며, 우리 모두가, 성모님을 본받아 더욱 견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서로 돕고,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도 믿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미사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 각자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공동체 차원에서, 우리 성당 전체 신자들의 믿음은 또 어떻습니까?
새벽녘에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가 풍랑에 시달릴 때,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오시며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 말라.” 그때 베드로 사도는, 자기 자신도 물위로 걸어오라고, 주님께서 명령해 주실 것을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뜻밖에도 베드로의 이 엉뚱한 청을 허락하십니다. “오너라” 그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물위를 걷게 되는데, 예수님을 향하던 시선이 그만 거센 파도로 옮겨지자, 불현듯이 두려움에 싸이게 됩니다. 믿음이 흔들리자 이내 침몰하게 됩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오늘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믿음이 약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성당에 다니며 나름대로 기도 생활을 하지만, 정작 풍파가 닥치게 되면, 금방 두려움에 빠지고 맙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 하지 마라”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해 주시지만, 그 말씀에 온전히 다 맡기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나를 살리고,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도, 가정과 교회를 살리는 것은 실로, 신앙입니다.
물론 신앙이 있다고 해서, 내 주변의 모든 문제가 일순간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 대로, 신앙은 고난의 탈출구가 아닙니다. 신앙은 오히려, 우리가 처한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직접 대면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신앙은 아무리 깜깜한 어두움 속에서도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 줍니다.
우리에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라고 말씀 하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는 분은 결코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1독서 말씀에서, 엘리아가 하느님을 체험한 곳은 막강한 힘을 지닌 바람도, 천지를 뒤흔드는 지진도, 모든 걸 태워 버리는 불 속도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안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은 뜻밖의 사고나 아니면 불치병에 걸렸을 때에나 찾게 되는 분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서, 우리 내면에서, 우리 일상 속에서 귀 기울이면 만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늘 전례말씀과 영성체를 통해서, 오늘 점심 밥상 가족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일 할 때나, 쉴 때에도, 주님은 우리 바로 곁에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 흥미로운 내용은, 베드로가 비현실적이면서 도무지 실현 불가능한 것을 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청을 받아 들이셨다는 점입니다. 우리도 베드로 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것까지 청해보면 어떨까요?
1)죽어도 용서할 수 없는 그 사람을, 오늘은 제가 용서 할 수 있게 해 주십사고,
2)늘 피하기만 해왔던 그 일을, 이제 저도 한번 해 볼 수 있는 용기를 주십사고,
3)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그 계명을, 마침내 저도 따르게 해 주십사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에게는 비록 불가능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실 권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에 풍랑이 멈추자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말하며 제자들은 엎드려 절했습니다. 이는 신앙의 신비를 체험한 공동체의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도 같은 고백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상 속에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비와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성모님께서 지니신 그 신앙을 우리도 똑같이 갖게 해 달라는, 이 어처구니 없는 소망까지도, 주님께서 꼭 들어 주십사고, 오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 드립시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와서 돈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 방금 들은 1 독서, 말씀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느냐?”나에게 오너라. 너희는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오늘 아침 우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참된 양식,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 그 영원한 양식을 찾아,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분은, 자비로운 하느님이십니다. 그 분은 사랑과 연민으로 우리를 보살펴 주십니다. 우리 때문에 아파하시고,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를 위해 아파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안타까운 죽음, 그 충격과 슬픔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따뜻이 군중들을 맞아 주십니다. 군중들을 가엾이 여기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당신 자신의 아픔은 속으로 묻어두신 채, 이웃부터 먼저 돌보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께서 지금은 어디 계시는지요? 끔찍한 질병과 굶주림 속에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갑니다. 해마나 일어나는 각종 자연재해로 혹은 뜻밖의 사고나 범죄에 희생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집과 가족, 희망을 잃어버린 채 도시의 뒷골목으로 내 몰리고 있습니다. 치료약은 커녕, 입을 옷도, 먹을 음식도 없이, 겨우 살아 가고 있습니다. 올해는 코로나까지 창궐하여 별안간, 직장을 잃고, 건강을 잃고,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분명 하느님이 계시고, 분명 그분은 사랑 이신데, 이러한 불행을 왜 보고만 계시는 걸까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저녁때가 되었으니, 군중을 돌려 보내시어, 스스로 사 먹게 하십시오.” 제자들은 군중을 걱정해 주고 있습니다. 걱정은 하는데, 그래도 어디까지나 그들의 문제, 그래서 그들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바치는 기도, 아니 온세상이 바치는 기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병자와 가난한이들의 처지를 걱정하며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는 하지만, 나서서 돕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구제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생각은 완전히 다릅니다.“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너희가 주어라”만일 제자들 말 대로 그냥 빈손으로 군중들을 돌려 보냈다면, 그 중에는 그날 저녁 굶게 된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바치는 우리의 기도, 아니 온 세상이 바치는 연민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어찌 외면하시겠습니까? 다만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희가 주어라.”안됩니다, 주님, 못합니다, 주님, “저희는 여기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 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은 할 수 없다고,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축복하시고, 나누어 주시니, 수천명에게 충분하게 돌아갔습니다. 그러고도 남은 음식이 열 두 광주리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열두명의 제자가 일일이 모두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맡았을 것입니다. 다시말해 광주리를 손에 들고 나누어 주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우리가 할 일을, 하느님께 떠 넘겨선 안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기적들 중에서, 네 복음서 모두에 나오는 기적은 오직 하나,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뿐입니다. 이는 단순히 군중들의 한 끼 식사를 해결해 주신 사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넘어 생명의 빵, 성체성사의 신비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성체성사를 빼놓고서는, 주님의 삶과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쪼개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걸 행하시는 분은 예수님 이십니다. 하지만 군중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우리는 오늘도,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기억하며,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며,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기도를 꼭 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어떤 것은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이미 주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해결책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내가 자긴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이를 쪼개어, 이웃들과 더 많이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누어서 기쁘고, 나누어서 더 행복한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이 미사 중에 주님의 크신 은총을 청합시다.
하느님을 모시는 기쁨! 예수님을 따르는 행복! 오늘 전례는 그 사랑의 기쁨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화답송, 시편 119, “주님은 저의 몫이오니, 당신 말씀 지키기로 약속 하였나이다. 당신 입에서 나온 가르침, 수천 냥 금은보다 제게는 값지옵니다. 당신 가르침은 저의 즐거움이옵니다. 저는 당신 계명을 금보다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당신의 법 하도 놀라워 제 영혼 그 법을 따르나이다.”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에서도 기쁨은 넘쳐흐릅니다. 뜻밖에 그리고 갑작스레 보물을 발견한 희열, 그리고 그토록 찾고 있던 최상급 진주를, 드디어 발견해낸 환희, 이들에겐, 이보다 더 좋고, 이보다 더 값진 것이 있을 수 없기에, 전재산까지 아낌없이 팔아, 빛나는 그 보물, 영생의 그 진주를 사들입니다. 발견하고, 팔고, 사들이는 과정이 일련의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기쁨 속에 발견하고, 기쁨 속에 팔고, 기쁨 속에 사들입니다. 기쁨 속에 예수님을 만난 어부들은, 기쁨 속에 그물과 배를 버리고, 기쁨 속에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리스도라는 진주를 발견하자 마자, 가진 것 전부를 이웃에 나눠주고, 오상, 주님을 닮은 다섯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팔아서 사고, 버리고 얻습니다.
성령 안에 살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만나려면, 진정 그리스도께 속하려면, 적어도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면, 전재산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는 자신을 내어 주는 봉헌, 이웃을 위한 희사가 있어야만 합니다. 날 마나 희생이라는 십자가를 져야만 하고, 매일 봉사라는 멍에를 메고 걸어야만 합니다. 그 희생이 비록 크게 느껴질 때도, 그 봉사가 종종 힘들게 와 닿아도, 하느님을 모시는 기쁨에 비한다면,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정도에 비한다면, 이 정도 쯤은 감당 할 수 있는 것!!! 그렇게 데미안 신부님이, 그렇게 켈커타의 성녀 데레사가, 그렇게 이 태석 신부님이 가난하고 고단한 일상이었지만, 기쁨, 복음의 기쁨 속에서 한평생을 바쳤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분의 제자이며, 크리스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립니다. 우리 대부분은 신앙인으로 살기위해 나름대로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따로 시간 내어 기도도 드리고, 가끔씩 혹은 정기적으로 봉사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것 과 비교해 봅시다. 여러분의 직장이나 사업, 가정, 여러분의 자녀들, 여러분의 건강 과 취미 활동 등등 거기에 기울이는 여러분의 관심, 애정, 에너지, 여러분의 정열, 투자, 시간에 비교한다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와 봉사는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르고, 미사도 형식적으로 참례하고, 기도 또한 기계적으로 바친다면, 거기다 자선은 아깝고, 봉사도 마지못해 억지로 한다면, 만일 그렇다면, 하늘나라의 기쁨을 도대체 어떻게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복음의 기쁨을 알지 못하는데, 우리가 하느님을 모시는 기쁨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 추수 때 밀과 가라지를 갈라 놓듯이, 어부들은 그물을 끌어 올려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립니다. 심판때에 의인들은 하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나게 될 것이나, 악행을 저지르고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어두운 곳에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명은 막중하고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준 사람들, 내 가족, 내 이웃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잘 설명해 주고, 그들에게 그 나라에 대한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그 나라가 임하도록 함께 기도하고, 마침내 그들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참된 기쁨을 선물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솔로몬 왕이 자기중심적인 재산과 건강을 청하지 않고, 오히려 백성을 잘 보살피기 위해, 다시말해 이타적인 목적에서, 잘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였듯이, 우리 또한 보나 나은 보물, 없어지지 않고 하늘에 쌓을 수 있는 보물을 찾고, 또 이웃에게도 이 보물을 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하면서 언제나 확고한 희망을 심어 주고자 했습니다. 오늘 2 독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신앙인에겐 고난도, 박해도, 모함도, 위험도 따를 수 있지만,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 결국에는 선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신앙인은 믿습니다. 사필귀정, 하느님께서는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사람들을 반드시 축복해 주시고 모든 것을 바로 잡아 주실 것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기쁨이며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흔히들 보물은 가까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행복은 일상 속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코로나 이전에 그저 평범하게만 생각되었던 일상이 지금 돌이켜 보니 너무나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코로나 대유행의 긴 터널 속에서 조차도 축복이라고 느낄 만한 일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아직 건강하고, 가족이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내 손을 기다리는 일도 남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소중하며 우리는 이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은 변하거나 불완전하거나 없어집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필연적으로 반드시 있어야 할 것 이라고는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영원하시고 그 사랑만이 완전하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과 기쁨과 즐거움도 많지만, 창조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제가 찾는 것은 바로 당신이며, 당신 안에서 저는 바라고, 당신을 열망하며, 당신께 일어서 나아가며, 당신을 받아 들이며, 당신 안에서 기뻐하며, 당신께 메달립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주님의 사랑과, 복음의 기쁨을, 우리도 가족과 이웃에게 전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제 2 독서 말씀에서, 우리는 오늘 커다란 위안을 받습니다.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와 확진자 수가 폭증하고 있고, 그로 인한 불안이 그 어떤 때 보다도 큽니다. 그렇게 온 세상이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펜데믹 상태에서도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희망을 안고 이자리에 모였습니다. 바오로 사도 말씀처럼“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지만, 우리 모두 인내심을 갖고, 희망 속에서,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가라지는 주로 밀밭에서, 밀과 같이 자라나지만, 밀과 달리 독성을 지니고 있어서, 먹으면 구토와 배탈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주인님,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종이 그렇게 묻자 주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세상에는 악이 존재하고 또 만연해 있지만, 그 악이 하느님으로부터 오지는 않습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선하고 아름다운 낙원이었으며, 그분은 우리가 죄 짓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악은 하느님이 아니라, 그분의 원수로부터 옵니다.
빛이 없는 어둠속에서, 사탄은 악의 씨앗을 뿌립니다. 가정과 공동체에 분열의 씨앗을 뿌리고, 이간질로 양쪽을 나누고, 거짓과 모함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끊임없이 갈등을 조장합니다. 악의 모습은 언제나 교활합니다. 빛이 없는 어둠 속, 사람의 눈을 피해, 곡식만 있는 밭에, 악을 심고 갑니다. 그리고 선과 구별이 안되도록, 악은 자신을 감추고 위장합니다. 가라지가 충분히 자라기 전에는, 밀과 서로 구분이 안되고, 뿌리도 서로 엉켜 있어서, 가라지를 뽑으면 밀까지 따라 뽑히게 됩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 삼간을 태운 다는 말이 있듯이, 악을 소탕 하려다, 공동체는 물론, 국가 전체가 혼돈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유속에 주인은 놀라운 인내심을 보여줍니다. 종은 당장 가라지를 뽑고 싶어 하지만, 주인은 추수때까지 기다리기로 합니다. 인간은 매사를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판단 할 때가 많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하지 않고, 이웃의 눈에 있는 작은 티에는 분노하고 비난합니다. 너무 쉽게 단죄하고, 너무 쉽게 심판합니다. 편견과 선입견으로 조롱하고 무시하고 거부합니다. 하지만 심판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이며,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하느님의 인내와 사랑입니다.
밀밭의 가라지는 잡초이고 쭉정이며, 독초이고 그저 땔감에 불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경우는 다릅니다. 큰 죄를 지었던 사람도 회개 할 수 있고, 반대로 착하게 살았던 사람도, 어느 순간 온갖 종류의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영원한 악인도 없으며, 또 영원한 선인도 없습니다. 너나 없이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그저 나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오늘 제 1 독서 말씀처럼, 하느님은 만물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시며, 죄인이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 자신은 하느님 곳간의 알곡이지만,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은 반드시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가야 된다고 믿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저기 저 강도나 죄 많은 세리들과 다르다고 자만에 빠지는, 그 오만한 바리사이와 사실 뭐가 다르겠습니까?
지금까지 내가 알곡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보니 가정과 공동체에서 독을 품고 있었던 가라지가 바로 나 였음을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그 사람,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이 회개 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그 죄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가 아닌, 이 죄인, 바로 내가 회개 할 수 있도록, 그토록 오랜 기간 기다려 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이제는 깨달으면 좋겠습니다. 나로 인해 가족과 이웃이 그렇게 신음하며 고통을 겪고 있다는 걸 스스로 알면 좋겠습니다.
뽑고 태우고 심판 받아야 할 것들이 바로 우리 자신 안에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에게는 새 삶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그렇게 잘 썩어 없어져야만 우리는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기를 인내 롭게 기다리시는 하느님, 그 하느님을 닮아 우리도 가족과 이웃에게 좀더 너그러운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 나갑시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기위해, 우리의 잘못부터 뉘우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그 분을 우러르며 그 분 앞에서,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을 위해 열심히 기도 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