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하늘로 불러 올리심을 기념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기쁨에 차서 노래를 부르십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뛰니,” 성모님이 이토록 기뻐하는 이유는 하느님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방법으로, 그 누구도 꿈꾸거나 상상하지 못했던 체험을 합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셨고, 평생 동정녀로서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사셨고, 성자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고, 육체와 영혼이 하늘로 들어 올려 지셨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충만함으로 가득 채워지셨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셨습니다. 마치도 옷을 입듯이 하느님의 권능, 하느님의 광채에 감싸여 계셨습니다. 오늘 요한 묵시록의 말씀에,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의 쓴 여인”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는 정확하게 과달루페 성모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 속에 계신 성모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소화 데레사 성녀가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사명은 내가 사랑했던 것 처럼 그렇게 다른 사람들도 선하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소화 데레사의 사명은 죽어서도, 천국에 가서도 이어지는 사명이었고, 세상 끝날 때 까지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성모님의 바람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께서 하느님을 사랑하시듯이, 그렇게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중재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상에 포도주가 다시 올라올 수 있도록 잔칫집 주인을 대신해서 예수님께 청하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성모님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 중재를 해 주십니다. 그런데 지상에서의 중재 능력과 천상에서의 중재 능력은 비교도 할 수 없다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생활에서는 그분의 신성이 감추어져 있었지만, 부활 승천을 통해 권능을 지니신 성자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성모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모님의 지상생활 속에서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면서도 겸손 속에 그 모습이 감추어 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과 승천으로 영광을 받으심으로, 성모님께서도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권능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것은 하느님처럼 되셨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성모님의 힘, 성모님의 권능은 바로 중재하는 권능이고, 중재하는 힘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막강한 중재의 힘으로 우리를 도와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들어 높여 주셨듯이, 성모님의 중재의 힘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 또한 들어 높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통하여 더욱 안전하게, 그리고 더욱 쉽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받으신 은총을 똑같이 우리가 받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하지만 전혀 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모님처럼 원죄 없이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세례와 고해 성사를 통해서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고, 또 죄를 멀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잉태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영혼과 육신이 승천 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고 마지막 날에 되살아 날 수 있습니다.
모든 세대가 성모님을 행복하다고 칭송하는 데, 성모님의 행복은 세속적인 부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행복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하고 오직 하느님과 함께 하는 행복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행복을 허락해 주십사 기도 드립시다. 하느님으로 인해 행복한 날, 하느님으로 인해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도록, 성모님의 힘있는 중재를 청합시다.
100도에 육박하는 뜨거운 날씨가 연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곤충까지도,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지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델타 변이 바이러스 신규 확진자 숫자가, 엊그제(6일) 하루만 해도, 미국 전역에서 13 만명이 넘었고, 로스앤젤레스도 3900 명이 넘었습니다. 날은 덥고, 코로나는 끝날 줄을 모르고, 덩달아 마켓 물가마저도 폭등하고 있습니다. 성당에는 왔지만 빈자리만 횅하고, 아무래도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이래저래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럴수록 기운 내시고, 다시 한번 힘을 내시라는 것입니다
“일어나 먹어라.” 주님의 천사가 잠자고 있는 엘리야를 흔들어 깨우면서 말합니다.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엘리야는 카르멜산에서 바알 예언자 450명과 대적하여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승리를 거둡니다. 그렇게 되자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 왕비 이제벨이 심부름꾼을 시켜, 반드시 복수하고 말겠다는 말을 엘리야에게 전합니다. 엘리야는 곧장 광야로 도망칩니다. 450명의 바알 예언자를 모조리 죽였으니, 이제벨에게 잡히는 날이면, 목숨이 열 개라 할지라도 살아남을 길이 없습니다. 공포에 떨면서 제발 죽여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카르멜 산에서의 용맹스러웠던 모습은 온데 간데없습니다. 기가 모조리 꺾이고, 이제는 더 이상 도망칠 힘도 잃은 듯합니다. 잡혀서 처참하게 죽게 되거나, 아니면 지금 이대로 굶어 죽거나, 엘리야가 취할 수 있는 길에는 죽음 뿐, 도무지 살길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생각과 계획은 달랐습니다. 천사를 보내어 빵과 물을 먹이고, 절망 속에 잠든 엘리야를 깨워서 다시 힘을 주십니다. 엘리야는 그 음식으로 힘을 얻어,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됩니다. 엘리야가 호렙산에 이르기 위해 40일이 걸렸다는 것은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40년이 걸렸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길이 아주 힘들고 길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힘든 여정을 돕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음식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앞에는 어떤 여정이 놓여 있습니까? 엘리야처럼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절망 속에서 걱정하고 있을 사람이 혹여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이와는 정반대로 지금처럼 앞으로도 쭉 더 아름답고 화려한 꽃길만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생각과 하느님의 계획이 어쩌면 이와는 다를지도 모릅니다.
저는 요즘 보살핌이라는 말을 자주 생각하고 또 자주 쓰고 있습니다. 보살핌이라는 말을 봉사, 희생, 사랑 등으로 바꿔서 쓸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 말이 점점 더 좋습니다. 언젠가는 저에게도 타인의 보살핌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나이 들고 병 들면, 먹는 것도 화장실 가는 일도 혼자 할 수가 없겠지요. 마치 아기였을 때 엄마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못 했던 것 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날이 닥치기 전 까지는 주변의 누군가를 보살 펴 줄 수가 있습니다. 가족이 그렇고, 우리 교우들이 그렇고, 쌜 회원이 그렇고, 우리 성당 화단의 나무와 화초들도 그렇고, 뽀르찌웅꿀라 구역의 형제자매들도 그렇습니다. 모두가 누군가의 보살핌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도 저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보살핌을 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다시 힘을 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먹고 기운을 차려야 하겠지요. 가나안 땅, 호렙산, 하느님의 품까지는, 앞으로도 여전히 멀고 힘든 여정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 예수님은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이 되셨고, 세상에 생명을 주는 음식이 되셨습니다.
성자의 몸과 성자의 말씀, 우리는 성체성사와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분께 다가가는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습니다. 코로나로 무겁고, 더위로 지쳐도, 다시금 힘내시고, 힘차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본받는 여정을 다시 시작해 나갑시다.
‘제사보다는 젯밥에 정신이 있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기 보다는 제삿밥에만 눈이 갑니다. 내가 해야 할 본연의 일, 정작 중요하게 매달려야 할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쓸데없는 일, 혹은 사사로운 이익이나 사사로운 욕심에만 매달리는 것을 빗 대어서하는 말입니다.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라는 속담도 같은 뜻입니다. 마땅히 부처님께 정성껏 예불을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도, 부처님 앞에 차려진 음식에만 관심을 두는 모습을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라고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젯밥에만 정신이 팔린 사람, 공짜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5,000명의 군중을 먹이신 기적, 큰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셨고, 사람들이 당신을 믿게 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모두가 나누어 먹었듯이, 그렇게 콩 한 쪽이라도 서로 나누며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섬기려는 신앙도 없었고, 예수님의 가르침, 사랑과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저 언제나 늘 공짜 밥이나 먹겠다고, 배들에 나누어 타고, 앞다투어 예수님을 찾으러 다닙니다.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자신의 왕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날마다 자신의 배를 채워 줄 왕을 원했던 것입니다.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은 또 다른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얼마나 어이가 없습니까? 불과 얼마 전에 5000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자기 눈으로 보고서도, 또 다른 기적을 원합니다. 얼마나 완강하고, 얼마나 탐욕스럽고,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1 독서에서 모세에게 대드는 백성을 쏙 빼닮았습니다. 종살이에서 구해 주었더니, 배고파 죽겠다고 아우성칩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는데, 이번에는 고기 먹고 싶다고 안달입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우리가 이집트에서는 참 좋았는데!”라며 웁니다. (민수 11, 18) 그러자 메추리기를 보내 주시니, 모두 다 환장하여 먹고 또 먹고, 배 터지게 먹고, 그러다 어리석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들이 묻힌 곳 이름이 키브롯 타아와, 결국, 탐욕의 무덤으로 던져지고 맙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벌이라고 말합니다.
탐욕스러운 사람들은 물질적인 빵에만 눈이 어두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영적인 빵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물질적인 빵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존경하고 존경받고, 인정해 주고 인정받고, 위로해 주고 위로받고, 격려하고 격려 받고, 보살피고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거저 줄 때도 있고, 거저 받을 때도 있습니다. 남 주는 건 아깝고, 칭찬에는 인색하고, 얻어오고, 받아오고, 가져오고, 빼앗아오고, 그러면서도 자기는 대접받고, 그러고도 존경과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면, 그렇게 모아서 모든 게 아무리 풍족한들 뭐합니까? 이미 썩을 대로 썩은 정신이, 결국은 썩어 없어질 몸 똥파리와 함께, 탐욕의 무덤을 향해 오늘도 나아 갈 따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2 독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참된 빵, 물질적인 빵이 아니라 참된 생명의 빵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과 영성체를 통해 영적으로 살아가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영적으로 행복해지고, 그래서 차츰 육체도, 정신도, 신앙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도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따르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해 나갈 때,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주님으로부터 보살핌을 받고, 주님으로부터 치유되고, 주님과 함께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미온적이고 불충실한 태도를 오늘 버리고 나눔과 희생으로 예수님을 닮기 위해 기도합시다. “주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주님께서 제자들을 최초로 파견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깊이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사명 중에,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습니다. 세상일에만 푹 빠져 사는 사람들에게 당장 회개하라고 선포하는 일도 그렇고, 마귀를 쫓아내는 일도 그렇고, 병을 고쳐 주는 일도 그렇고, 우리 눈에는 하나 같이 불가능한 일로만 보입니다. Mission Impossible!
사실, 믿음이 없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들입니다. 믿음 없이는, 남을 애써 돌 봐주는 일도, 바른길로 인도하는 일도, 악의 세력에 용감하게 대항하는 일도, 나랑은 별로 상관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강 건너 불 보듯, 소 닭 보듯이, 그저 남의 일로만 생각될 뿐,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자들은 뜻밖의 성과를 거둡니다. 빵도, 여행 보따리도, 여비 한 푼도 없이 떠났던 제자들이 신나서 기뻐하며 돌아옵니다. Mission Possible. 주님의 덕분에!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 18) 흥분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너무도 좋아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의 성공을 아낌없이 축하해 주십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사탄이 하늘에서 맥을 못 추고 뚝뚝 떨어져 나갔다며 기뻐해 주십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으로 제자들을 격려해 주십니다. “(더러운)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제자들이 이제 맛있는 식사도 하고, 눈도 좀 붙일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꿀 같은 휴식을 주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그렇지만, 이날도 결국에는 쉬지를 못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좀 쉬려고, 외딴곳으로 떠날 때에, 군중은 육로로 달려 배보다 더 빨리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그날도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3가지가 돋보입니다. 보셨다. 불쌍한 마음이 드셨다.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굽어보시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소 닭 보듯이, 그렇게 무심히 쳐다보지는 않습니다. 거리에서 헐벗고 굶주린 이들을 보시며 얼마나 애가 타 실까요? 사분오열, 서로 잘나 똑같이 무시하고, 늘상 미워하며 분열된 사람들을 보면서, 또 얼마나 속이 상하실까요? 목자 없는 양처럼, 평생을 목적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주님의 가르침은 하나같이 생명의 말씀입니다.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이웃을 살립니다. 나누어라, 보살펴라, 회개하여라, 화해하여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여라,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 복음 바로 그 다음의 이야기는 오병이어의 기적, 5,000명을 먹이신 기적 입니다. 미사에서 말씀의 전례 다음에 성찬의 전례가 이어지듯이, 군중으로 가르치신 다음에는 빵을 나누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사랑이고, 언제나 사랑은 실천과 연결됩니다. 듣고 배운 것은 반드시 실천으로 이어져야만 합니다. 깨달았으면 반드시 나눔으로 이어져야만 합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이어져야만 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실행할 때, 그때 비로소 나눔의 기적, 용서의 기적, 사랑의 기적, 평화와 행복의 기적이 날마다 일어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목자이며,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시편 말씀처럼, 푸른 풀밭에서 우리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이끄시고, 영혼에 생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고,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를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언제나 실행합시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미사 때마다, 한껏 기뻐하며, 주님께 우리가 한 일, 우리가 가르친 일을 말씀해 드립시다.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것을 세상의 그 어떤 일 보다 더 기뻐하는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이 미사 중에도 정성껏 기도드립시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온 예수님께서 나자렛 마을 사람으로부터 무시와 배척을 당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좌절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 33)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이렇듯이 여러 마을을 다니시며 가르치셨고, 오늘은 열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이 받은 사명의 중심은 예수님이십니다. 애초에 제자들을 부르신 분도 예수님이시고,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신 분도 예수님이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 분도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일을 수행합니다. 제자들은 어디까지나 파견 받은 사람으로서, 자신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고, 그저 자기 좋을 대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시키신 그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로, 주님으로 부터 파견된 사람입니다. 주님의 현존 안에서, 주님의 능력을 받아, 주님께서 하셨던 일, 주님이라면 마땅히 하셨을 만한 일을 해 나가야 합니다. 마귀를 쫒아내고 병을 고쳐 주는 일, 다시 말해, 예수님처럼 악의 세력에 대항하고, 예수님처럼 환자와 가난한 사람을 보살펴야 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 베텔의 사제는 아모스가 못마땅해서 말 합니다. 너희 나라(유다)로 꺼져서 거기서나 밥 벌어먹고 살아라.
그런데 아모스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는 사람,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리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곳)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그렇습니다. 정녕, 주님께서 우리를 붙잡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모두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어떤 위협에도 주저 앉거나 굴복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붙잡아 명령하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싫어도 못해도 힘들어도 그래도 해야 합니다.
“지팡이 이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말씀 하실까 싶습니다만, 탈출기의 말씀이 먼저 연상됩니다. 탈출기 12, 11 “그것을 먹을 때에는 허리에 띠를 메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집트를 탈출 해 나올 때 신속히 몸만 빠져 나와야 했으므로, 당연히 세간살이 모두 집에 남겨 두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 약자를 돌보는 일, 사랑을 실천하는 일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면 일각을 다투는 긴급한 일입니다.
느긋하게 다른 일 할 것 다하고, 코로나 다 없어지고, 여유 생길 때 그때 가서 천천히 해도 되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한 끼 나눔만 해도 그렇습니다. 왜 진작 좀 서둘러서 5년전, 10년전, 그렇게 좀 일찍 시작하지 않았을까 후회도 듭니다. 그때도 지금도 수도 없이 많이 굶 주리고, 병들고, 외로워서 죽어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신발은 신으라고 하셨는데, 공사장에서 안전모와 작업화 없이 일할 수 없듯이, 한 끼 나눔 이동 급식을 가면서 마스크 착용 없이 나설 수 없듯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나를 지켜줄 보호장비가 필요 하고, 먼저 적절한 준비태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이토록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나는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성경과 교회 가르침을 공부하십시오. 나는 믿음이 부족해서.. 공동체와 일치하여 열심히 성체성사에 참여하십시오.. 나는 죄가 너무 많아서…뉘우치고 성사보고 용서를 받으십시오…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잘 몰라서… 봉사에 참여 하십시오.. 나는 두려움 때문에... 기도 하십시오..
신발을 신으라고 하시는 것은 아마도 제자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너무 중요해서 일 것입니다. 시급하게 복음을 전하러 달려가야 할 발이다쳐서는 안되는 거죠.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어찌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은 나눔에 목마르고, 사랑에 굶주리고 있고, 믿지 않는 사람으로 넘쳐 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우리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아마 오늘도 우리의 신발끈을 손수 묶어 주시며 말씀 하시는 듯 합니다. 너희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얼른 가서 선포하여라. 가서 정의를 실천하고, 약자를 돌보아 주어라. 내가 너희와 같이 갈 것이다. 오늘 미사에서도, 우리를 붙잡아 주신 분이 주님임을 잊지 말고, 복음선포에 필요한 은총을 내리시도록 정성되이 기도합시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은총을 받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을 하던 여인은 자신의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한 회당장 야이로의 딸, 열두 살짜리 소녀는 자기 아버지의 믿음과 기도 덕분에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이와는 정반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지역을 두루 다니며,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 내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둘러 쌌던 군중은 기적을 직접 체험했거나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을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마침내 돌아오시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는데, 뜻밖에도, 이곳 나자렛 사람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완전히 딴판이었습니다.
방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에 한편 놀라면서도, 어느새 마음이 바뀌어서, 이내 무시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한낱 동네 목공소집 아들, 이웃집의 아무개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위대한 메시아 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하고, 대놓고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루카 복음을 보면, 예수님 말씀 때문에 버럭 화를 내고, 예수님을 밀어 죽일 작정으로 벼랑까지 끌고 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십니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라고 말씀 하셨는 데, 실로, 고향 마을 나자렛, 유독 거기에서 만큼은 기적이 없었습니다. 아니, 예수님 마저도 기적을 일으킬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예언자를 환영하지 않던 곳이 어디 나자렛 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 전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1 독서 표현대로,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저 자손들, 저 반역의 민족, 반항의 집안!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오던 그날,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직접 새겨 주신, 그 증언판을 들고 내려오던, 바로 그날에도, 백성들은 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놓고, 먹고 마시고 흥청거리며 놀았습니다. 어디 그때 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은혜와 계명을 저버리고, 하느님을 외면했던 때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하느님을 대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가 이토록이나 불충하고 불손하였으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에 대해서도, 그 태도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화답송의 시편 말씀처럼, 예언자의 운명은 거만한 자들의 조롱을, 교만한 자들의 멸시를 죽도록 받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감언이설로 헛된 꿈을 심어 주던, 거짓 예언자에게 너무나 쉽게 속으면서도, 에제키엘 처럼 정작 진리를 전하는 예언자는 오히려 배척했습니다. 오늘 1 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오죽 답답하셨으면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 싶습니다. “너는 그들에게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한다’ 하고 말하여라.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입으로는 고백하지만, 정작 하느님의 계명은 어느 만큼 따르는지요? 나자렛 사람이나 이스라엘 백성에 비해 뭐라도 낫다고 할 만한 점이 있긴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고 하는데, 코로나 이후로 더욱 약해진 우리의 믿음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또 한 번, 놀라지는 않으실까요? 우리가 믿지 못하는 것을 보시면서 말입니다. 아무리 기적을 행하시려고 해도, 나자렛처럼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더 이상 아무 것도 못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믿음의 회복이 과거의 그 어느때 보다도 절실 한 시기입니다. 오랜 기간 성체를 영하지 못하면서, 믿음이 뿌리 채 흔들리는 사람도 더 많아 졌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 모인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긴다는 바오로 사도를 본받아 나갑시다.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우리 각자의 예언직에 더욱 충실 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셨는데, 우리의 믿음을 통해 이웃도 함께 구원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믿음의 큰 은총이 내리도록 이 미사 중에 열심히 기도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세례 성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두 개의 날개를 달아 주셨습니다. 한 쪽은 은총의 날개이고 다른 한 쪽은 믿음의 날개입니다. 우리는 은총과 믿음이라는 두 개의 날개가 있을 때, 비로소 하느님께 나아 갈 수 있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우리는“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받습니다. 이처럼 은총과 믿음은 구원에 있어서 결코 없어서는 안 될 두가지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도 우리에게 귀가 없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은총이 크다 할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은총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흙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리 비가 많이 내린다 해도, 식물은 자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면, 은총이 자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받은 은총 마저도 잃어버리고 맙니다. 한 쪽 날개를 잃은 새가 날 수 없듯이, 믿음 없이는 온전한 신앙 생활이 불가능 합니다.
오늘 복음은 믿음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열 두 해 동안이나 하혈 하던 여인은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열 두 살 소녀는 자신의 아버지 야이로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탈리타 쿰은 오늘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코로나로 움츠려 놓은 두 날개를 다시 활짝 펴고 마치 독수리처럼 힘차게 날아 오르라는 말씀 처럼 들립니다.
은총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듯이, 믿음 또한 하느님에게서 오는 선물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가운데서도 은총의 문은 활짝 열려져 있습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우리 각자에게 믿음의 큰 선물이 내릴 수 있도록, 정성껏 기도를 드립시다.
길 조심, 차 조심, 사람 조심/ 물 조심, 더위 조심, 낙상 조심/ 코로나 조심, 말 조심, 건강 조심/ 살면서 조심해야 할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이 문열의 장편소설(황제를 위하여)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젊을 때는 혈기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 여색을 조심하고, 장년에 이르러서는 혈기 바야흐로 강한지라 싸움을 조심하며, 늙으면 혈기 쇠한지라 탐욕을 경계하라 했습니다.” 그러나 매사에 조심을 해도 세상의 풍파를 모조리 다 피해 가기는 어렵습니다. 코로나 같은 경우, 전에는 알지도 못했고,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로 인해, 수백만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경제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사람이 넘쳐납니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끔찍한 불행이 갑자기, 뜻밖의 곳에서, 느닷없이 찾아오곤 합니다.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욥은 하느님을 섬기고 착하게 살았지만, 하루 아침에 재산과 가족을 잃게 되고, 무서운 병마저 얻게 됩니다. 그에게 무슨 잘못이나 실수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어디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사탄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그러자 죽음 보다 더한 고통이 속수무책으로 욥을 괴롭힙니다. 친구라고 찾아온 이들이 위로는 커녕 욥을 비난하고 멸시합니다. 지금껏 남 부러울 것 없이 살았는데, 그저 착하게만 살았는데, 한 순간에 절망의 나락에 빠지고 맙니다. “아, 제발 누가 내 말을 들어 주었으면!” 욥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 도무지 이해가 안되고, 생각할 수록 억울해서 절규합니다. 하느님께도 항의합니다.“이제는 전능하신 분께서 대답하실 차례!” 우리도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비슷한 질문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제가 도대체 뭘 잘 못 했다고, 하느님, 이런 고통과 시련을 주십니까?
그런 욥에게 하느님께서 되 묻습니다. “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네가 그렇게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너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나를 단죄하려느냐? 네가 하느님과 같은 팔을 지녔으며, 그와 같은 소리로 천둥을 칠 수 있느냐? 대답해 보아라.” 언뜻 보기에는 하느님의 이 말씀이 야속하게만 들립니다. 달래 주시기는 커녕 야단을 치시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하늘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신 분께로 향하게 해 줍니다. 내 고통이 너무 큰 나머지, 그만 잊어버리고, 저버리며 살았던 하느님, 원망하기도 했던 그 분께로 말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 고통의 의미를 알고 계시고, 하느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지만, 우리는 불안하고 걱정하고 겁이 나면서도, 정작 하느님은 찾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걱정하면서도, 하느님을 찾지 않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세찬 바람에 비틀거리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에게는 기대지만 하느님을 무시하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거센 돌풍으로 배가 침몰 할 지경이 되었는 데도, 예수님께서는 초연하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웁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이 말에는 불평과 원망이 잔뜩 묻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식간에 바람과 물을 잠재우십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제자들은 감탄합니다. 세상 풍파야 다 피할 수 없겠으나, 그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타고 있는 이 배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장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을지라도, 하느님께서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잊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항해를 멈추지 않는 이상 풍랑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피하기 보다는 꿋꿋이 헤쳐 나갈 용기와 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길을 찾을 수 있고,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욥의 운명을 주님께서 다시 되돌려 놓으셨 듯이, 간절한 사랑, 무한한 신뢰로 우리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 드립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미사 참례 의무에 대한 대주교님의 관면이 곧 종료됩니다. 오는 주말인 6월 19일부터는 로스앤젤레스 대교구의 모든 신자들이 인원수의 제한이나 사회적 거리두기의 규제 없이 성전 내부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만큼 우리가 사는 이곳, 천사의 도시가 안전 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축하합니다. 다음주 부터는 미사 중에 여러분 모두 맘껏 성가를 부를 수 있습니다. 오늘로써 우리는 유튜브를 통한 생방송을 종료하고, 마지막으로 다음 주일에 한 번 더 이 곳 바깥에서 미사를 드리고, 6월 27일, 연중 제 13 주일 부터는 성전 안에서 주일 미사를 봉헌할 것입니다.
누군가가 뜻하지 않은 재난을 당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나 영웅적인 행동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방역봉사자가 그렇습니다. 집 바깥에 한 발짝도 나가기가 무서웠던 바로 그 때에도, 봉사자들은 교우가 앉았던 의자를 일일이 소독했습니다. 방송팀의 두 분, 유베드로, 남마태오 형제님, 그리고 성가대의 박라우렌시아, 박모니카 자매님, 네 분 모두 우리의 영웅입니다. 코로나가 가장 극성을 부리던 늦겨울에도, 성당에 나와 노숙인의 점심을 챙겼던 여러분이야 말로 작은 천사입니다. 여러분의 헌신적인 봉사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성당의 미사 일정을 코로나 이전으로 돌려놓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몇 가지 준비가 더 필요합니다. 실로 전례봉사자 없이 원래 미사 시간표 대로 곧바로 되돌려 놓기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환자를 제외한 모든 교우의 미사 참례입니다. 대주교님의 뜻이 바로 이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오십시오. 성체성사는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은총을 유지시켜 줍니다. 주님과의 일치를 증대시켜 줍니다. 안심하고 오십시오. 더이상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더는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다 오십시오. 성당의 문은 활짝 열려져 있습니다. 주저하지 말고 오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반기실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또 우리 모두에게 기쁜 날입니다. 모두가 서로 얼굴 보며 다시 만날 희망으로 말입니다.
우리 성당의 정원만 둘러 봐도 유난히 아름다운 꽃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만도 레드우드 처럼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나무가 있는가 하면, 세상 달고 맛있게 익은 오랜지가 가지가 부러질 듯 주렁주렁 달려 있는 나무가 있습니다. 오랜지 꽃향기는 또 얼마나 향기롭습니까? 사람도 마찬 가지입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처럼, 야자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향백나무처럼 성장한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의 집에 심겨져, 하느님의 앞뜰에서 우거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연세가 많아도 열매를 맺고, 물이 올라 더 싱싱한 의인이 있습니다. 우뚝 성장한 겨자나무 처럼 큰 가지를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 진짜 어르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농부이신 하느님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1 독서 말씀 처럼,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가지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를 무성하게 하시는 분은 다름아닌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모르게 신비롭게 일하십니다. 우리가 잘 알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용히 그리고 아주 천천히 일하시는 것 같습니다. 마치 씨앗이 싹이 나 자라는 것이 우리 눈에는 신기하기만 하고, 그저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는 것 처럼 보이듯이,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 하고 성장 시켜 주십니다.
성체성사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성체안에 계신 예수님 보다도 더 작고, 더 조용하고, 더온순한 분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성체를 영하고, 그분의 겸손에 우리 자신을 일치시키고, 그분의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마음과, 우리 일상을 채워 나간다면, 미천한 우리이지만, 드높은 향백나무처럼, 새들이 깃드는 겨자 나무처럼 성장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코, 우리를 성장 시켜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우리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씨앗이 자라고 곡식이 익으면 낫을 들어 수확을 하 듯이, 우리 또한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 말씀처럼 우리가 한 일에 따라, 우리의 협력 정도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 처럼 언제나 주님 마음에 들고자 노력하며 삽시다. 현세든 내세든, 살아서든, 죽어서든, 주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살아 가도록 노력합시다. 하느님의 사랑보다 자비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미사를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미사는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크신 은총에 대해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제사 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밭을 부드럽게 갈아 주시고, 말씀의 씨앗을 뿌려 주시고, 잘 자라도록 가지도 잘라 주시고, 마침내 좋은 열매를 맺도록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Don Dolindo Ruotolo 신부님(1882-1970)은 이런 기도를 바쳤습니다. 오, 예수님, 주님께 저의 모든 것을 맡겨 드리오니. 모든 것을 주님께서 살펴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진심으로 기도를 바친 다면, 이는 곧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보살펴 달라는 기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능으로 가장 어려운 일도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모든 것을 내 맡기고, 그분의 계명을 따른 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목표, 최종 목적지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확신을 갖고, 주님 마음에 들도록, 주님의 뜻을 먼저 찾도록 노력해 나갑시다.
오늘 본기도의 내용 처럼,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희가, 거룩한 은총의 도움으로 계명을 지키며, 마음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충실히 따르겠다고 다짐하먄서 이 미사를 정성껏 바쳐 드립시다. 오늘 미사의 입당송과 똑같이 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저를 도와 주소서,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쫓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그렇게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기도를 들어 주시도록 오늘도 정성껏 미사를 드립시다.